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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문화의 서술을 위해 몇 가지

유념하고 싶은 것들(1)

2011.5.31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한국종교문화에 대한 정리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자료도 다듬지 못했고, 이를 논리화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이론과 방법도 갖추지 못했다. 그저 마음뿐이다. 원인은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종교’라는 개념이 우리의 종교문화를 서술하고 인식하는 도구로서 적합한 것일까 하는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종교문화를 서술하는 작업이 우리의 역사 안에 있는 여러 종교들을 개개 종교로 나누어 이를 제각기 서술하고, 그렇게 서술된 각 종교사를 각 장으로 나누고 다시 종합하여 ‘한국종교사’라는 이름으로 편집해 내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부터 언급하겠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개항기 이전에는 없던 단어이다. 그것은 외래어이고, 그 곳에서 특정한 문화현상을 지칭하는 ‘전문용어(technical term)’이다. 그렇다면 ‘religion(종교)’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현상은 실은 우리에게 없었던 현상이다. 우리의 경험이 개념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당대에 이 용어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우리가 지닐 수 있었더라면 ‘religion(종교)’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현상을 우리의 새로운 인식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낯선 문화에 대한 인식을 도모했어야 하며, 그 용어가 우리 문화의 어떤 현상을 서술하는 데 적합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살폈어야 한다. 그러나 religion(종교)이라는 개념의 도입이 이루어졌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그렇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것이 앞선 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전이해(前理解) 탓에 그 낯선 개념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서술하는 일을 서두르면서 마침내 ‘relilgion(종교)’은 우리의 문화서술을 위한 새로운, 그리고 규범적인, 범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진전된 ‘religion(종교)’의 수용은 복잡한 여러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두 다른 분류학(taxonomy)의 구조적 충돌이 간과된 채 그 중의 하나가 자기 분류학의 체계를 다른 분류학의 체계 위에 과했다고 하는 사실이 지니는 문제이다. 전혀 다른 인식범주가 우열의 판단을 전제한 채 복합적으로 중첩되면서 우리의 문화인식에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현상이 어떻게 비판적 평가가 거의 결여된 채,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사태는 강요된 ‘개방’과 다르지 않은 힘의 작용이 인식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펼쳐진 것과 다르지 않은 사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이미 당대의 우리는 인식주체로서의 자율권을 어떤 의미에서든 나 아닌 타자에게 양여했거나, 아니면 타자의 인식 틀에 의해 내 기존의 인식 틀을 재편성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강요된 인식에의 무사려 할 수 밖에 없는 추종’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의 전통적인 인식이 당대의 정황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적합성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religion(종교)’의 수용은 새로운 인식 틀의 모색과정에서 일어난 오히려 긍정적인 자성(自省)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이어 당연히 도달하는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종교문화사를 서술하려는 의도와 만나면서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religion(종교)’은 낯선 개념이다. 그만큼 그 용어의 적합성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용어를 그 때 이후 이제까지 익히 사용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전통적인 경험 속에 ‘religion(종교)’으로 개념화해도 좋을 어떤 경험이 분명히 있었는데 다만 다른 개념적인 언어로 다듬어졌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는 더 넓은 소통의 보편성을 위해 그 경험이나 용어를 ‘religon(종교)’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면서 relgion의 역어인 ‘종교’를 우리의 경험을 담아 펴야하는 새로운 개념어로 선택하는 것이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religion(종교)’은 근원적으로 서양의 경험을 개념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개념도 개념사(槪念史)를 지닌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 함축의 변용을 겪는다. 하지만 그 용어는 기본적으로 ‘신에 대한 예배(cultus deorum)’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어떤 경험을 묘사하고 담기 위한 개념어로 사용되었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 용어의 일상적인 용례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러한 ‘religion(종교)’이라는 개념어를 통해 우리의 종교를 서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결국 religion이 한국의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하는 판단준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religion이 한국의 종교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을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이미 우리의 현실에서 ‘religion(종교)’의 통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religion의 개념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우리의 경험과 religion이 포함하고 있는 경험을 모두 담는 새로운 우리의 개념어를 마련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할지라도 두 다른 개념어가 빚는 구조적인 혼효는 여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religion으로서의 종교’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그 전후를 나누는 의도적인 실험을 해볼 수 있다. 우리의 종교사를 서술하면서 ‘religion(종교) 이전의 종교’와 ‘religion(종교) 이후의 종교'를 나누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학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서양의 근대화에 의하여 전통적인 것이 거의 단절되는 것과 유사한 그러한 근대화를 겪은 문화권에서는 어디서나 겪는 문제이다. 우리는 서양문화를 ‘익히 경험한 바가 없는 데도 나 자신의 것인 양’ 여긴다. 어색한 표현을 한다면 서양은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은 자아’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문화는 ‘익히 경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타자처럼’ 여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우리에게 ‘경험된 타자’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왔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적합성을 결여한 개념의 적용을 통해서 기술한 우리의 문화나 역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그 개념에 적합한 ‘서양적인 현상’만을 찾아내어 그것이 곧 우리의 문화라고 서술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 대한 새로운 성찰이 일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한국의 종교연구에만 해당되는 논제가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의 단위가 인류 모두를 망라한 총체성의 차원에서 되짚어져야 한다는 자각이 일게 된 오늘의 정황에서 보면 전승된 개념들의 적합성여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비단 종교에 한한 문제도 아니고, 이른바 문화의 전-수(傳-受)주체에 따라 어느 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오늘의 학문이, 그래서 종교학 자체도 어디에서나 누구나 직면하고 있는 불가피한 과제이다. 소박하게 말하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렇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진지하게 몰두하게 되면 아예 우리의 물음은 ‘도대체 우리는 종교에 대한 발언을, 또는 인식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정황에서도 여전히 물음을 묻는다면 그 때 등장하는 종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객체가 된다. Jonathan Smith가 1982년에 그의 책 Imagining Religion: From Babylon to Jonestown(University of Chicago Press. p.xi)에서 ‘종교는 다만 학자의 연구가 지어낸 산물일 뿐이다. 학자가 사물을 분석하기 위해서 자기의 상상을 통한 비교 및 일반화의 작업에 의하여 빚어낸 것이다. 종교는 학문과 분리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다’라고 한 언급은 그러한 경우의 사정을 잘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발언을 진지하게 반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Tomoko Masuzawa 교수의 The Invention of World Religions(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가 이 문제일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주목할 것은 ‘종교’라는 개념어에 관한 문제의 제기가 한국의 종교연구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의 학문 일반이 직면하고 있는, 그래서 종교학도 직면하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이다.

-(2)부는다음호에 계속-

* 이글은 지난 서강대 종교연구소 국제학술대회(5.20-21)의 기조강연을 요약한 글입니다.

정진홍_

본 연구소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mute93@daum.net


주요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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