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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82호-변화하는 순례, 변화하는 성지(최화선)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3. 11. 18. 18:00

 

 

                     변화하는 순례, 변화하는 성지




2013.10.1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요새 주변에서 ‘순례’라는 말이 자주 눈에 뜨인다. 최근 출판된 꽤 유명한 일본작가의 신작 제목에도 ‘순례’가 들어가 있고, 서점에 가보니 그 외에도 책 제목에 ‘순례’가 들어간 신간 소설이 두어 권 더 있었다. 여행 서적 코너에는 스페인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찾아가는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안내서, 기행문 등이 가득하다. 이전에는 힘들고 지친 당신, 여행을 떠나라고 말했다면, 왠지 요새는 힘들고 지친 당신의 영혼을 치유해줄 ‘힐링’ 여행, 순례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순례는 ‘힐링’의 열풍을 타고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순례는 종교적인 장소, 성지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종교에서 중요시되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여행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 여행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 쉽게 떠오르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이미지는 여러 사람들이 순례단을 조직하여 마치 관광을 떠나듯 성지를 찾아가는 여행과, 혼자서 힘겹게 수행하며 길을 가는 여행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힐링 여행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순례는 전자는 아닌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은 비록 예전 수도사들의 고행까지는 아닐지라도, 800km에 달하는 그 길을 걸어서 간다는 행위에 의미를 둔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일본의 시코쿠 순례에서도 88개의 사찰을 둘러보며 1200km 가까이 되는 그 길을 걷는다는 행위가 강조된다. 이는 요즘 사람들이 관심 갖고 있는 순례의 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특정 종교 전통의 맥락보다는 개인적인 영성이 강조되고, 여행을 통한 마음의 치유 등이 강조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감명 받은 이에 의해 만들어진 제주도의 ‘올레길’이 새로운 순례지처럼 부상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올레길’은 특정 종교 전통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순례길이 아니지만, 걷기를 통한 개인의 변화와 치유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소위 ‘걷기 영성’을 추구하는 순례길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순례와 순례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추구와 열망에 따라 만들어지고 재정의되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걸으며 수행하는 순례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마치 그것이 순례의 온전한 모습이고 따라서 단체 관광 순례는 그러한 온전한 형태의 순례가 상품화되고 관광화되면서 원래의 본질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순례의 상품화와 관광화는 비단 현대에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순례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따라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의도로 특정한 성지를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있어왔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에 유명한 성인의 유해나 유물을 안치해서 그 곳의 위상을 높이고 이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사실 최근에 유행하는 걷기 중심의 순례들 역시 ‘개인의 영성의 추구와 힐링’을 내세운 새로운 상품화, 관광화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순례가 관광화 상품화된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각 시대마다 어떤 의도로 어떤 형태의 순례와 어떤 순례지들이 주목받게 되는지, 어떠한 의도로 기존의 성지가 재정비되고 활성화되는지, 그러한 경향은 당시의 어떤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지 관심 기울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미국의 가톨릭 여성사제운동 단체인 미래교회(FutureChurch)는 2006년부터 순례단을 모집해서 매년 로마로 순례를 떠난다. 이 순례단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가톨릭의 전통적인 성지들을 찾아다니면서도 그곳에서 성지에 대한 가톨릭의 일반적인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장하는 역사 속 여성사제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역사 속에서 지워진 여성사제들을 다시 기억하는 의례를 행하며 이를 통해 이 장소들을 여성사제의 성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말 그대로 아직까지 시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순례는, 성지를 둘러싼 내러티브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 순례자들의 의도에 따라 순례지의 성격 자체가 변화할 수도 있다는 것, 순례는 단지 기존의 형식만 따라가는 고정된 여행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주장과 의도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또 변화할 수도 있는, 역동적인 종교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군소
hschoe@empas.com
논문으로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여성, 순례, 새로운 기억과 서사: 미래교회(FutureChurch)의 로마 순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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