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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84호-21세기 종교학의 몇 가지 특성(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3. 11. 18. 18:03

 

            

                      21세기 종교학의 몇 가지 특성



2013.10.15

 

21세기 종교학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탐구주제의 다양성’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비록 호교론적인 것과는 다른 비판적 인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른바 전통종교 또는 세계종교라고 일컬어지는 ‘위대한 종교’에 대한 관심이 그것 자체로 논의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는 상황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하는 것이 전통종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와는 다른’ 종교현상에 대한 관심이 들어섰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기술한다면, 앞에서 지적한 ‘관심의 전이 또는 변용’이란, 전통종교를 비롯한 ‘종교 일반’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거나 심화되면서, 당해 종교들의 자기주장에 대한 관심보다는 왜 그 종교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현존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학문적 방향이 재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를 ‘종교를 그것 자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가능한 다양한 맥락에 위치지우면서 그 현존을 새삼 관찰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학의 학문적 관심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이미 1998년에 마크 테일러(Mark C. Taylor)는 기존의 종교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에 대한 인식에 입각하여 시카고 학파의 여러 동료들과 함께 종교학에서의 중요한 개념들을 선택하여 이에 대해 개별 학자들의 관심을 기술하게 함으로써 ‘종교학의 새로운 전회’가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편집한《종교연구를 위한 비평적 용어들(Critical Terms for Religious Studies)》은 개인의 저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의 심각성을 기존의 개념어나 새로운 개념어를 천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집합적인 논구의 형식을 빌어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저작은 ‘신념’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희생제의’라든지 하는 고전적인 종교학적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밖의 19개 항목은 전혀 ‘낯선’ 것들이다. 영어 알파벳순으로 나열하고 있어 문제의 일관성을 확연하게 일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러한 관심들이 기존의 종교학적 관심을 어떻게 ‘일탈’하고 있는지를, 혹은 얼마나 다른 차원에서 종교에 대한 인식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몸, 갈등, 문화, 경험, 성(性), 이미지, 자유, 현대성, 연희, 인성, 합리성, 유적, 종교·종교들·종교적인 것, 영토, 시간, 변화, 일탈, 글쓰기 등의 낯선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2000년에 윌리 브라운(Willi Braun)과 러셀 매커천(Russell T. McCutcheon)이 편집한 《종교 연구 입문(Guide to the Study of Religion)》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곳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은 ‘서술’과 ‘설명’과 ‘위치 지우기’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서술’에서는 정의, 분류, 비교, 해석 등이, ‘설명’에서는 인지, 결핍, 민족성, 교류, 성(性), 지성, 현현, 기원, 투사(投射), 합리성, 의례, 신성(神聖), 사회형성, 계층화, 구조, 세계 등이, 그리고 ‘위치 지우기’에서는 모더니즘, 낭만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문화, 이데올로기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2003년에 발간된 개인 저술인 맬러리 나이(Malory Nye)의『종교: 기본 원리 (Religion: The Basics)』의 목차는 이러한 종교학의 전회를 선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문화, 힘, 성(性), 신념, 의례, 문헌, 오늘의 종교와 오늘의 문화 등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주제들 가운데 상당수의 항목들이 고전적인 종교학의 주제들과 중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주제들이 주요한 논의를 위한 초점으로서 일관되게 천착되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제들을 기존의 ‘종교’와 관련하여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선택된 그러한 주제들의 맥락에서 기존의 종교들이 다시 읽혀지면서 그러한 종교들 자체가 기존의 접근과는 다른 시각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조화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미 앞에서 예거한 여러 항목들에 자연스레 스며 있어서 개별적인 항목으로 구체화하기조차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이를테면 우리는 상당히 오랜 고전적인 논의의 주제인 ‘종교와 과학’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른바 전통종교 또는 세계종교라는 도식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자리에 선다면, 이 주제는 ‘종교라는 개체’와 ‘과학이라는 개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요한 논의의 내용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학의 새로운 관심에 의하면, 이 주제에 대한 그러한 접근은 더 이상 진전된 인식의 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비생산적인 동어반복의 장에서 맴돌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 둘의 어느 것을 택일하는 규범이 인식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나 진화를 위요하고 벌어지는 논의의 내용은 수세기의 흐름을 간과해도 좋을 만큼 어떤 구조적인 변화도 수반하지 않은 채 여전히 ‘진리주장’이라는 담론에 갇혀 있다. 그런데 적어도 그러한 논의의 틀에 갇혀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그리 논리적으로 단순하지 않다. 종교와 과학은 중첩되어 경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겪으면서 이전의 어떤 계기에서 인식된 둘 간의 구분이 현실 안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마저 또한 드러내고 있다. 다르게 묘사한다면, ‘종교의 맥락에서의 과학’이라든지 ‘과학의 맥락에서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현상 속에서 우리는 이 둘을 모두 ‘지극히 소박한 일상적인 삶의 맥락’ 안에서 아울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주제가 여전히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든지, 그 논의는 마땅히 택일적인 규범에 의해서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의 삶의 정황에 대한 우려할 만한 부정직을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적인 물음을 바꿔야 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기존의 인식 틀이 더 이상 적합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인지과학에서의 종교에 대한 논의’나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논의’에서 뚜렷하게 감지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인지과학의 인식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는 현상이며, 또한 문화현상 일반에서 예외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이해가 이러한 탐구 현장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학이 직면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종교를 되묻는 일이다.

 

이 같은 사실은 현대의 종교학이 종교라는 것을 ‘실재’라기보다 ‘현상’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맥락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학은 특정한 종교의 현존을 전제하고 비로소 그 종교와 다른 현상, 곧 정치나 과학이나 예술 등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 추이를 따라 탐구하기보다는, 현존하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면서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구조나 그것이 생산하는 효용과 의미를 읽으려는 새로운 접근을 의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제된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어떤 현상이 복합적인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기술되는 과정에서 ‘종교’라고 기술되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한에서만 ‘종교’가 종교이게 된다. 앞에서 예거한 새로운 주제들은 이러한 관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향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종교의 자기주장에 대한 관심’에서 ‘인류의 종교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종교라고 일컬어온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게 한 인간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는 역사·문화적 구체적 장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게다가 바로 그렇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이른바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맥락에서의 종교의 부침(浮沈)’을 망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의 종교학은 종교를 논의하지 못하는 관점이나 자리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드러나지 않을 상황이나 자리도 또한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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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대한민국학술원에서 2012년 12월31일에 발간한 <<학문연구의 동향과 쟁점 제2집: 철학, 심리학, 교육학>>(비매품) 내의 '종교학'편에서 정진홍 선생의 글 서론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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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_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한종연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mute93@daum.net
주요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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