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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41호-지령 30호를 맞이하여(종교문화비평30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11. 24. 16:37

 

 지령 30호를 맞이하여

 


 

 

 

 


 

 

 news letter No.441 2016/10/25

 

 

 

《종교문화비평》 창간호를 낸 것이 2002년 4월입니다. 그런지 열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이번 호는 서른 번째로 나오는 책입니다. 횟수(回數)가 적지 않고, 세월 또한 짧지 않습니다.


첫 권을 낼 때 나이가 서른다섯이었다면 지금은 쉰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분에게는 이 책을 만들면서 젊음을 다 보냈다고 해도 좋을 세월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음을 다 보냈다고 해도 좋을 세월입니다. 새삼 확인하는 이 서른 번째 출간의 마디에서 어쩌면 그런 분들은 마치 흐르는 세월이 샐까 조심스레 고이 담은 항아리를 아끼듯 이 책을 사랑해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어떤 분에게는 그 삶이 도로(徒勞)였다고 회상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분에게는 그 삶이 소모(消耗)였다고 기억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른 번째든 몇 번째든 어쨌거나 그런 마디와는 아무 상관없이 마치 이 책과 맺은 인연이 마루에 쏟아진 세월 같아서 어서 걸레질 하여 닦아버려야 할 거라고 서두는 분도 계실 겁니다. 힘드셨을 모습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어떤 분이 어떤 반응을 하셔도 좋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리 자존(自存)한다는 자존(自尊)을 지닌다 해도 향방(向方)과 강약(强弱)을 가리지 않는 바람을 맞으며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그리 뚜렷하게 자존(自尊)을 지니고 자존(自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실은 앞의 서술처럼 도식적인 기술은 비현실적입니다. 어떤 때는 어떤 까닭으로 사랑했다가도 어떤 때는 어떤 까닭으로 힘들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진자(振子)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이 ‘존재의 실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야 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마디를 긋는 계기를 잘 서술하고 있는 ‘제의의 구조’를, 지금 여기 서른과 열다섯의 고비라 해서, 굳이 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참회와 고뇌와 되 비롯함의 다짐을 통해 마침내 변신을 이루어야 하는 ‘마디의 윤리’라는 과정이 어차피 그 서술된 구조처럼 기계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끼면서 그 이론자체에 조금은 식상(食傷)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소박한 인식과 사소한 배려’라는 일상성에 머물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 계기에 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몫일지도 모른다는 염치없는 생각조차 하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감히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이 《종교문화비평》이 연구의 결과가 집적되는 자리만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구결과를 수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래왔듯 이 책은 ‘자료의 보고(寶庫)’가 되고, ‘지식의 궁전(宮殿)’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권위’를 늘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수 있기 위해 어떤 규범이 편집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공연한 ‘잔소리’입니다. 이미 알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이어지는, 열린, 또는 새로운 연구’를 자극하지 않으면 연구결과의 축적은,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든, 우리가 그처럼 피하고 싶었던 이른바 ‘학문적 권위의 배타적 구축(構築)’과 먼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폐쇄된 학문공동체’처럼 ‘유치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요람에서의 안락을 자신의 성숙이 초래한 결과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책에 실리는 연구결과들은, 다시 말하지만, ‘이어지는, 열린, 또는 새로운 연구’를 자극하는 동인을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문적 엄밀성의 속성은 겸양이지 오만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종교문화비평》은 지속적인 간행을 의도한 결과로 끊임없이 이어 출간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내기 위해 매번 얼마나 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 아픔을 서른 번이나 겪었다고 하는 것은 슬픔을 넘어 잔인을 극한 일이었다고 묘사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필자, 편집자, 재정적인 문제, 출판사, 반포하는 일 등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일 수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냉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서나 모든 ‘일’ 에서 그러한 아픔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실토해야 합니다. 순교적인 정서를 기리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태를 일상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속을 의도한 결과로서의 지속뿐 만 아니라 결과가 의도한 지속도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가해지는 출간에의 압력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가피하게 간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책의 끊임없는 태어남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나친 이상론이라고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의 책은 실은 그러한 ‘결과가 낳은 지속’의 에토스 속에서 이제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다고 하는 것을 간과할 만큼 겸손했거나 아니면 둔감한 채 지속만을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드러난 독자뿐만 아 니라 잠재적인 독자, 그러니까 ‘모두에게, 모든 것에게, 감사하면서’ 우리의 간행을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자화자찬의 어리석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너무 비장한 다짐을 권하는 것이어서 자칫 자학적인 것으로 전달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제법 ‘종말론적’인 자세로 《종교문화비평》의 출간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권이 창간(創刊)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매권이 종간(終刊)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의 설정이 없는 과정은 결과적으로 그 과정자체를 기만하는 데 이른다는 주장은 ‘과정론’에 관한 익숙한 비판입니다. 무리하지 않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지금의 온전하지 못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함의 축적이 마침내 목표에의 이름을 보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간과 종간의 일치는 온전함의 축적을 현실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속에의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속자체가 가치로 전제됩니다. 때로는 지속의 내용은 지속의 장단이 결정하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속으로 위장된 허무’조차 의미의 실체로 승인하는 부정직을 범합니다. 누천년 지속한 거대한 종교유적은 그것이 현존 했을 때 그것으로 인해 벌어졌을 반종교적 참상을 가린 채 유적으로까지 이어진 그 지속의 엄청남을 기리면서 당대의 진실을 은폐해버립니다. 지속에의 신앙은 그러한 의미에서 ‘편리한 환상’입니다.


그러한 미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내는 이 책이 그대로 창간호이기를, 그리고 종간호이기를 기하는 태도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도 이상론으로 치부되어 거절될 수 있는 주장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종교문화비평》의 출간이 서른 번을 거듭하면서 한 번도 그것이 창간이고 종간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형편’에 이렇게 오랜 세월 지속할 수 있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서 이러한 발언이 《종교문화비평》에 대한 불평인지 만족인지 희구인지를 저 자신도 잘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 마디에서 우리 모두 즐겁고 감사하고 환하고 싶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이 책의 주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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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종교문화비평>30호(2016년 9월30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 입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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