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 대한 생각
news letter No.478 2017/7/11
연일 폭우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그런데 무덥기 짝이 없다. 내일이 초복이니 말 그대로 삼복더위가 시작된 셈이다. 올 여름의 더위는 또 어떻게 이겨낼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래도 요즘은 냉장고에 선풍기, 또 에어컨까지 다들 갖추고 사니, 전기요금 걱정만 없다면 삼복더위도 그리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것이 있는 집은 아주 드물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작 부채질과 탁족(濯足)으로 더위를 견뎠다. 그리고 얼음이 있었다. 오늘날에야 얼음이 흔하디흔한 물건이지만, 그 시절 여름철의 얼음은 꽤나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때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었는데 얼음 한 덩어리 값이 100원이었다. 그러니 웬만큼 잘 사는 집이 아니면 얼음이란 게 자주 사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낮 기온이 35,6도 쯤 되는 찜통처럼 더운 날이라야 큰 맘 먹고 사 오는 귀물(貴物)이었다. 그렇게 사 온 얼음을 바늘로 깨어 수박 속과 섞어 화채를 만들어 먹고, 남은 얼음은 콩국수에 넣어 저녁으로 먹었다. 그 때의 수박화채와 콩국수는 어찌 그리도 시원하던지! 이게 다 얼음이 부리는 조화였다. 그래서 여름 한철 동안 몇 번 안 되었던, 얼음 사 오는 날은 우리 형제들에게는 거의 잔칫날이었다.
물을 얼리는 기술이 없던 옛날에도 여름철의 얼음은 있었다. 오래 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신라 때의 석빙고를 보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조선시대에는 한겨울에 한강에 두껍게 언 얼음을 캐어 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꺼내어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일 것도 없이, 서울에 아직 남아 있는 동빙고동, 서빙고동이라는 지명만 봐도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여름 얼음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과 고관대작의 집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大夫)의 집을 벌빙지가(伐冰之家)라 했다. 왕조시대에 여름에 얼음을 쓸 수 있도록 비축하는 일은 그야말로 국가적 사업이었다.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벌빙(伐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시경(詩經)》이다. 그러니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최소 3,000년은 되는 관습인 셈이다. 《시경》 <국풍(國風)> 의 빈풍(豳風)편에 보면,
섣달에 쿵쿵 얼음을 깨어 두었다가 二之日鑿冰沖沖
정월 되기를 기다려 빙고에 넣네 三之日納于凌陰
2월이 되면 아침 일찍 서둘러 四之日其蚤
염소를 바치고 부추로 제사 지낸다네 獻羔祭韭
라는 내용이 있다. 곧 음력 12월에 얼음을 채취해 두었다가 맹춘(孟春)인 1월에 빙고에 저장하고, 중춘(仲春)인 2월이 되면 처음으로 빙고의 얼음을 꺼내서 염소, 부추와 함께 종묘에 올린다는 것이다. 이런 절차를 마친 뒤, 여름이 시작되는 음력 4월이 되면 빙고를 크게 열어 얼음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어서 늙고 병든 이를 봉양하고 상례(喪禮)와 제사에 쓰게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에 대한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해설이다. 소동파의 말에 따르면, 얼음을 저장하고 꺼내는 일은 양기(陽氣) 곧 양(陽)의 기운을 컨트롤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양기가 천지(天地) 사이에 존재하는 방식은 불이 사물에 작용하는 방식과 같아서 너무 세력을 부리게 하면 안 된다. 12월은 《주역(周易)》의 임괘(臨卦)에 해당하여 양기가 아래에 엎드려 있는 형국(아래 괘 그림 참조)이므로 얼음을 땅 속에 갈무리함으로써 땅 속에 갇혀있는 양기를 제어하고, 2월은 대장괘(大壯卦)에 해당하여 양기가 막 땅 위로 올라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얼음을 처음 꺼내어 종묘에 제사지냄으로써 막 기세를 올리기 시작하는 양기를 제어하고, 4월은 건괘(乾卦)에 해당하여 양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때이므로 얼음을 크게 내어 대부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양기의 막강한 기세를 제어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춘하추동 음양(陰陽)의 기운이 순조롭게 작용하여 자연재해나 기상이변이 없게 되고, 돌림병도 생기지 않아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이 소동파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소동파의 설명을 황당한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말 것인가? 물론 모든 것을 실용주의와 과학의 논리로 설명하려 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고방식은 터무니없는 것이리라. 또 옛날이라고 해도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꺼내 쓰는 일의 원래 목적이야 당연히 실용적인 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을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실용적인 목적에서 하는 일도 항상 자연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서 실행하였다. 우리는 위의 《시경》 귀절에 대한 소동파의 해석을 통해, 자연 질서를 음양의 조화로 이해하고 이에 순응하여 행동하려는 옛 사람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욕심과 과학기술의 폭주로 지구가 망가져 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옛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김호덕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