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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26호-‘힐링’이라는 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6. 12. 17:42

 

‘힐링’이라는 말

 

 

                      news  letter No.526 2018/6/12                  

 


 

 

 

 

 

 


       힐링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듣게 된 지 꽤 되었다. 이제 일상어로 정착이 된 것 같이 보인다. 힐링이라는 말은 “치료”(治療),“치유”혹은 “신유”(神癒)라는 용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기존 용어가 아니고 “힐링”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치료라는 용어는 근대적 병원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연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힐링은 병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대 의학의 치료와는 달리 병원을 넘어서 이루어진다는 어감을 갖고 있다. 둘째, 힐링은 제도 종교가 주장하는 신유(神癒)나 민간신앙적인 치유의 의미와도 차이가 있다. 한국에는 신유를 내세운 종교집단이 적지 않다. 거기에서는 성령의 불꽃이나 주문으로 질병을 고친다고 광고하며 많은 이를 신자로 이끌었다. 질병에서 구원하는 방식은 집단마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비슷한 것은 오직 자기네 집단에 소속되어 무조건 헌신해야만 된다고 주장한 점이다. 힐링은 이런 배타적 함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셋째, 신유나 치유라는 말에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비(非)과학적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데, 최근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 힐링에는 비과학적이라기보다는 초과학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힐링의 의미에는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있다는 점, 육신만이 아니라 마음 전반에 걸친 불편함을 다룬다는 점, 배타적이 아니라 포용적이라는 점, 종교적 함의에서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기적의 치료처럼 초월적이고, 비과학적일 필요가 없다는 점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힐링은 개인의 육체적 질병을 근대적 병원이라는 제도 장치를 통해 고친다는 뜻의 치료와 구별되며, 다른 한편으로 종교적 혹은 신비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뜻의 치유와는 다른 의미 연관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즉 그 의미 연관에서 두드러지는 두 가지 측면인 전체성과 균형은 근대식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생의학(biomedical) 모델¹이 외면해온 것이며, 집단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종교집단이 지닐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게다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힐링은 이제 지구어로 등극한 영어라는 점이다. 힐링이라는 영어 발음은 뭔가 달라진 의미에 권위의 후광을 입히는 역할을 한다.² 유창한 영어발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식의 혀를 짧게 잘라내는 수술에 돈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결코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우리네 상황이 아닌가? 이런 무드 속에서 힐링이라는 말은 어느 틈엔가 우리 입 안으로 스며들어 우리의 혀와 함께 굴러다니게 되었다.

       힐링이라는 말이 “치료”(治療),“치유”, “신유”(神癒) 등의 용어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자신의 영토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차츰 힐링 담론이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근대의학의 독단적 생의학 모델과 종교집단의 배타적 이기주의에 반발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는 힐링의 관점이 일단 주목을 끌게 되자, 광범위한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총체를 만든다”혹은 “온전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힐링의 어원이 보여주듯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또는 육신이든 정신이든 균형을 상실한 모든 것이 힐링의 관심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힐링의 메시지는 고장난 것이 생의학 모델의 주장대로 개인의 육신에만 있지 않으며, 해결책은 기적의 신유를 외치는 종교집단의 주장대로 배타적 열광이나 자아포기의 복종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힐링은 병원에서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병원 밖에 있지만 몸과 마음이 고단한 이를 향해서도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힐링은 자기 영역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 들어와야만 치유의 효과가 생긴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힐링의 청중은 매우 폭이 넓어서 신앙의 차이를 비롯하여 사회의 많은 경계선을 가로 지르며, 힐링의 영역도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고달픈 일상의 전반에 걸쳐 작용한다.

       이처럼 힐링은 “온전성의 회복”을 기치로 하여 여러 영역을 포괄하면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일상에서 느끼는 반복적인 고단함과 심신의 피곤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링 담론의 첫 번째 특징은 개인의 육체적 질병에 국한하지 않으며, 종교적 배타성에서도 벗어나서 광범위한 청중을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힐링 담론의 포용성 때문에 폭넓은 범위의 인구집단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힐링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균형의 회복이 지닌 여러 가지 차원 가운데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불균형, 즉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부조화, 개인의 내면적 갈등 관계가 주로 다루어진다.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계의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자연 환경이 거론될 때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자연 속에서의 휴식이 개인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취급될 뿐이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해결될 것이고, 개인의 내면적 문제는 생각을 조금 바꾸거나 속도를 조절하면 저절로 풀릴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을 억압하는 외부의 장애물에 대한 염려는 별로 없다. 문제의 관건은 단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리하고자 얼마나 단단하게 각오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면 된다!”혹은 “Nothing is Impossible!”이 힐링 담론의 기본 표어로 나타난다. 고칠 것은 개인 관계 및 개인 내부에 있고, 고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힐링 담론의 세 번째 특징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방적 긍정주의로서, 개인의 몸과 마음에 불균형이 초래되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과 비관주의적 습관 때문이므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실제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며, 한탄하고 불평만 해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늘 밝고 명랑한 반면, 인생 낙오자는 불평만 가득하고 늘 트집만 잡는 자다. 결국 균형이 깨져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항상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한 당사자의 잘못 때문이다. 그래서 힐링을 위해서 더 이상 불만만 투덜대지 말고, 사회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판을 멈추어야 하며, 밝고 명랑한 측면만 살펴보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이런 밝고 긍정적인 인생관에 붙여지는 이름이 바로 “행복주의”이다. 이로부터 “인간은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 혹은 “인간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의 표어가 등장하게 된다.

       또한 힐링 담론은 개인 중심주의 및 긍정 일방주의를 보편적 인간의 조건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개인이 중심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을 동서고금의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관철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개인의 “자연적”성향을 구속하는 것이 있다면 그 억압은 “자유”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긍정적 인생관은 순종(順從)의 미덕과 정신과 육체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으로 스스로 정당화 한다. 여기에 간증이 덧붙여지는데, 예컨대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긍정적인 자세의 여부에 따라 얼마나 서로 다른 차도(差度)를 보이는지 가지가지, 구구절절이 소개된다. 죽을병에 걸려서 쉽게 낫지 못하는 환자는 또 다시 긍정성의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한 낙오자가 되고 만다. 자신이 긍정적으로 마음만 잘 바꾸면 행복해 질 수 있는데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자해(自害)하고 있는 셈이고, 결국 모든 잘못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된다. 결국 자학의 자동기계는 우리 모두의 행복한 순종과 체념을 불쏘시개로 삼아 계속 굴러가고 있다.

       아, 이 힐링의 인생은 정말로 행복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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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의학 모델이란 질병을 “고장난 육체”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관점을 말한다. 질병의 사회적 측면, 심리적 측면, 습관적 측면이 갖는 중요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육신과 정신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으며, 질병 원인이 주로 외부의 독립된 실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 질병의 의미적 차원은 중시되기 어렵다.

2) 한국에서 영어는 이제 미국과 영국의 한낱“나랏말씀”이 아니라, 지구의 보편어로서 대접 받고 있다. 그 위력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면 외화 제목을 요즘 어떤 식으로 번역해 놓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처럼 영어제목을 그대로 음만 따다가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피어 미뉴텐”(Vier Minuten)이라는 독일어를 영역하고 음차하여 “포 미니츠”라고 붙이는 놀라운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이런 서비스를 베푸는 한국인에게 한글은 지구어 영어에 비하면 초라한 변방어에 불과하다. 내가 영화제목에 대해 시비를 건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 동아일보에 〈영화제목이 '呪文' 같다고?〉, 2005년 경인일보에 〈꼴불견 영화제목〉이라는 글에서 그 불만을 터뜨렸지만, 관심을 기울인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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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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