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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不得已]” 인생의 편안함



  news  letter No.600 2019/11/12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잘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잘 맞기 때문이며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이 잘 맞기 때문이다(忘足履之適也, 忘要帶之適也, 忘是非心之適也,)
                                                                                                            -《장자(莊子)》 〈달생(達生)〉편-


나이가 들수록 점점 편안해지고 싶어진다. 이전에도 그다지 치열하거나 전투적으로 삶을 산 적이 없으면서도 염치없게 편안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편안해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편안할까? 게으름을 피워 보았다. 그런데 게으름이 주는 편안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직무유기나 불성실을 명분으로 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육체적인 편안함 역시 익숙해지자 무뎌지게 되었다. 안일한 일상은 다시 번뇌와 망상으로 복잡하게 얼크러졌다. 나는 편안하고 싶지만 어떤 것이 편안한 것인지 조차 모르는 원초적 불편 함 속에서 살고 있으며 불편함은 그 밑에 매우 깊고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였다.

진정한 편안함은 과연 어떤 상태이며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장자(莊子)》 〈달생〉편을 보면 편안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구절이 등장한다. 신발에 문제가 없어 편안하면 발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으며 허리띠에 불편함이 없으면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물(外物), 곧 외부사물 세계가 개인의 의식에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비판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의식이 되지 않는 상태, 자기가 없는 것 같은 상태, 곧 주체와 객체, 외부사물과 자신의 분리나 차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가장 편안한 상태라고 장자는 말한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대상과 관계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자》는 ‘무기(無己)’, ‘상아(喪我)’, ‘망기(忘己)’ 등의 표현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자아소멸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장자가 부정했던 자아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사물로 인해 소외되고 대상화되는 자아이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잊거나 버리는 행위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를 잊거나 잃은 상태는 왜곡된 자아의 현실을 부정하고 대상적 자아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조화로운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관계 속의 자아이기도 하다. 이렇듯 ‘나 없는 나’의 상태는 고립이나 은둔을 통해서 도달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나 사물과의 온전한 소통과 교감을 통해서 달성된다. 따라서 대상과 온전히 교감하는 능력,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온전히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 곧 망기(忘己)나 상아(喪我)의 경지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이렇듯 자기가 의식되지 않는 경지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로서 제시하는 것은 안명무위(安命無爲)와 부득이(不得已)함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때로 장자의 ‘안명론(安命論)’은 운명론적이고 패배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안명’은 사실 양생(養生) 즉,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명의 보존과 삶의 향유를 내포한 개념이다. 세속적 가치나 목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손상시키고 삶을 고단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 사물이나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그것이 가지는 목적에서 발견하는 목적론적 시각과는 대비되는 주장이다. 개인이나 사물의 존재이유나 목적, 혹은 용도를 따지거나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장자는 비판한다. 오히려 “쓸모없는 것의 유용함(無用之用)”의 예를 통해 목적이나 용도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충실히 따르는 삶의 가치와 필요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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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에도 쓸모 없으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죽음에 가까워서야 그럴 수 있으니 나는 이제 대용(大用)이 되었다. 나를 쓸모 있게 하였으면 이 위대함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予求無所可用久矣, 畿死, 乃今得之, 爲予大用. 使予也而有用, 且得有此大也邪. 《莊子》 〈人間世〉)

용도나 목적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충실한 삶을 주장하는 안명의 논의는 한편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현실과 개체의 자유 사이의 모순적 충돌을 안고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모든 자유는 사실상 특정한 환경이나 조건, 제약 속에서 실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자유는 제한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덕(德)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본래 어찌할 수 없는(不得已) 바가 있는 것이니 오직 사정에 맞게 행동하고 자신을 잊어야 한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여유 따위가 어찌 있겠는가!(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德之至也...固有所不得已. 行事之情而忘其身,何暇至於悅生而惡死. 《莊子》 〈人間世〉)

‘어쩔 수 없음(不得已)’란 어떤 의미에서 만물의 자연적 이치, 그리고 그 이치의 필연성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득이함에 맡긴다는 것은 그러한 이치의 필연성에 공감하는 일이며 따라서 장자는 어쩔 수 없는 바에 자기를 맡기고 내면[中]을 수양하라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안명과 부득이함에 맡기는 태도는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 본성과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고 그것에 순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주어진 삶을 그저 묵묵하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그러한 사람에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지루하지도 피곤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태어나 늙어가고 죽어가는 모든 과정이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불평등이다. 우리사회의 분노와 자괴감은 사실 원초적, 선천적 불평등에 대한 무의식적 자각에서 기원한 것은 아닐까? 제도의 개혁이나 정권의 교체만으로 그것이 쉽사리, 혹은 완전하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근거 있는 육감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바탕에, 어찌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자기 체념적 자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의 부득이함의 이치에 따라 타자와의 경계 없이 완전히 동화되는 ‘나 없는 나’의 경지가 되는 것,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편안의 기술이다. 읽어보니 설득력이 있다. 그럴 듯하다. 그런데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음과 불편함이 남는다. 부득이(不得已)와 득이(得而)를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안명과 자유의 경계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내 인생의 부득이함을 온전히 받아들여 안명할 여유나 용기도 없다. 그리고 득이와 자유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능력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편안하고 싶지만 여전히 불편함을 느낀다. 이러한 불편함 역시 내게는 부득이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용기를 내 본다. 부득이한 내 인생의 순간들에도 발을 잊고 허리를 잊는 편안함을 맛보는 가끔은 있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최수빈_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논문으로는 <중세도교의 자연개념 고찰-위진남북조 시대를 중심으로>, <도교의 생사관-전진교 문헌을 중심으로>, <도교의 금욕주의(Asceticis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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