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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99호-인간, 괴물, 몬스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11. 5. 16:16

인간, 괴물, 몬스터

 

 news  letter No.599 2019/11/5   

 


《링》
이라는 공포영화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단짝인 친구와 함께 비디오플레이어가 놓인 안방에서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친구는 공포영화의 모든 장면을 절대 지나치지 않고 무척 자세히 관찰하는 편이다. 겁 많은 나를 위해 친구는 귀신이 우물에서 올라와 점점 클로즈업되는 장면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 귀신이 걸어 나오고 있어, 점점 다가오는데...오, 눈이 썩은 생선 눈이야! 음.. 아직 눈 뜨지 마. 기다려봐......이제 귀신장면 지나갔다~ 눈 떠도 돼." 무서운 장면임을 알리는 음향효과 및 친구의 자세한 묘사를 들으며 나는 오싹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공포영화 호러 장르가 대중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흥행하는 것도 이처럼 불안한 공포 그리고 즐거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짜릿하고 묘한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잡기놀이 때 상대방에게 잡히는 것을 무서워하며 소리를 지르지만 동시에 잡힐 뻔하다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져 도망가는 순간, 까르르 숨 가쁜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한다. 초등학교 이상 즈음으로 올라가면서 무서운 귀신이야기 듣기를 즐기는 것도 그렇다. 인간은 한 편으로는 두려움과 공포를 가능한 한 피하려 하는 듯하나 다른 한 편으로는 공포의 감정을 통해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한다. 쾌락과 공포는 인간 본성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공포영화에서 인간에게 위협적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귀신, 데몬, 사탄, 몬스터/괴물 등이다. 기독교 문화적 배경에서 데몬은 ‘악한 영’으로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영적 존재, 타락한 천사인 사탄 등이 그에 속한다. 데몬은 철저한 악의 화신이며, 아름다움과 선함의 총체인 천사와는 상반된 존재이다. 데몬이 영적 존재라면, 이 땅에서 인간과 함께하는 물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역겨움, 공포, 때로는 신성한 두려움과 매혹을 야기 시키는 존재는 바로 몬스터이다.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동화나 영상물에서도 몬스터가 많이 등장한다. 쿠키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Sesame Street의 새파란 쿠키 몬스터부터 도깨비, 뱀파이어, 트롤, 설인(雪人), 외계인, 좀 더 멀리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열광하는 공룡까지도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 몬스터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기괴한 형상보다는 좀 더 귀엽게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친구로 그려진다. 물론 사악한 몬스터도 등장한다.

어쨌든 몬스터는 괴상하고 기이한 대상, 즉 괴물이다. 몬스터는 마귀나 사탄, 유령처럼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몬스터의 성격은 그렇게 변화무쌍한 듯 하면서도 또 인간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지니며, 인간과 교감하기도 한다. 몬스터는 축귀(exorcism)를 통해 인간으로부터 쫓아내어질 사악함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여 만들어내고 우리와 긴밀하게 공존하는 비인간(inhuman)인 것이다.

현대에 우리가 자주 접하는 몬스터류 영화는 주로 기술문명과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상상력으로부터 등장한다. 현대적 몬스터 이야기의 첫 신호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18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이었다. 라투르(Bruno Latour)는 정치생태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글, "당신의 몬스터를 사랑하라!"(Love your Monsters!) 초반부에서 이 소설을 언급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원래 몬스터를 창조한 박사의 이름이건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창조물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부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원죄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만한 흉측한 괴물을 창조했다는 데 있지 않다.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 과정과 그 완성에 대한 기쁨, 쾌락의 순간은 잠시였을 뿐,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이름조차 받을 수 없던 ‘그것’은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후 창조자가 자신을 정의한 방식 그대로인 “타락한 천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사랑하는 가족과 아내, 그리고 자신의 창조자인 박사까지 살해하고 만다. 괴물/비인간이 잔인한 악마로 변신한 까닭은 사실 그 본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자와 세상에 의해 악마화되고 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사는 호기심과 기쁨, 쾌락으로 그것을 창조했건만, 창조물로부터 드러나는 자신이 예상치 못한 공포와 대면하려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제 박사의 이름은 몬스터의 것으로 기억된다. 박사는 사라지고 몬스터만 남은 것이다.

몬스터는 부정과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신적인 것의 경계에 서있고 인간 같으면서도 인간이 아니다. 멕시코 이민자 출신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2018)에서는 인간과 몬스터의 관계가 매우 직설적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 음악과 더불어 지극히 몽환적 동화인 동시에 지극히 차갑고 차별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1960년대 미국, 벙어리(mute)로 불리며 홀대받는 고아이자 장애인인 일라이자는 항공우주 연구 센터에서 일하는 청소부이다. 그는 남미의 강 속에서 살며 원주민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다 실험용으로 끌려온 양서류 몬스터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결국 깊고도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을 철저히 짓밟는 존재는 양서류 몬스터를 포획해온 보안 책임자 스트릭샌드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으로서 건장한 체격의 백인 중산층인 그는 윗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아랫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다. 장애인인 일라이자와 그녀의 흑인 친구인 젤다를 경멸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창조되었지. 하지만 신은 너희들 보다는 나와 더 가깝게 생겼을 거야.” 그러나 출세를 위한 열쇠인 양서류 몬스터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트릭샌드는 신과 가까운 형상이 아닌 악한 몬스터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더러운 것”으로 부르며 혐오하던 괴물에게 공격당해, 상대를 짓밟으며 권위를 내세우는데 사용하던 그 잔인한 목소리를 잃는다. 몬스터에게 성대를 공격받기 바로 전 그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신(神)이었군!”

지젝(Slavoj Žižek)은 자연으로부터 인간 정신이 언어를 매개로 하여 출현하는 것에 관한 헤겔의 사상에 라캉의 사유를 접합시키며, 인간 정체성의 가장 기본적 수준이란 바로 좀비상태라고 해석한다. 좀비를 통해 우리는 인간성의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핵심을 성찰할 수 있다. 인간은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훈련을 통해 그 제로레벨인 몬스터와 같은 야생성은 길들여졌다. 그러나 이 몬스터는 억제되어지고 영원히 억눌려져야 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인간의 심연이자 돌봄을 받아야할 존재이다. 이 몬스터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주요하게는 상대방에 대한 투사를 통해 수용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반영한 이들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난민,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나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상반된 사람 등등.. 더 나아가 인간이 낳은 인공지능 및 그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그 순간 – 비록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자리와 정체성, 그리고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은밀한 쾌락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 앞에 공포와 불안을 야기 시키는 낯설고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는가.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그저 불안에 떨며 몬스터를 저주하고 그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성찰하게 해줄 기회이자 나를 또 다른 가능성과 새로움의 길로 이끌어 줄 구원으로 승화시키는가. 그저 어렴풋하고 막연한 공포, 두려움을 상상하는 것 이라면 오히려 그것을 용기 있게 마주할 때 새로움과 창조의 가능성으로의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혼란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내가 혐오하는 대상을 저주하면서 나를 내세우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각자의 부족함을 인내하고 인정하며 어떻게 더불어 나아갈지를 고민해야하는 것 아닐까. 라투르의 말처럼 ‘사랑하기’까지는 아직 능력이 부족하니 우선 그 첫 걸음으로라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여 본다. 너의 몬스터를 마주하라.

 




김태연_
숭실대학교
논문으로는 , <테크놀로지의 진화와 종교적 체험의 동역학: 근대시기 천도교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슐라이어마허 『종교론』의 수용사적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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