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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04호-창바이산(장백산), 백두산, 태백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12. 10. 20:30

창바이산(장백산), 백두산, 태백산

 

 

news letter No.604 2019/12/10

 

 


얼마전 한 공영 방송이 백두산의 가을 풍경을 소개하며 백두산을 ‘창바이산’이라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 당시 뉴스 앵커는 ‘지린성 창바이산’이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일각에선 독도를 일본식으로 ‘다케시마’라고 칭한 것과 같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뉴스가 다시 뉴스가 되어버린 해프닝에서 독도가 한ㆍ일간의 갈등이 첨예한 곳인 것처럼 백두산은 한ㆍ중간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필자는 보도의 잘잘못보다는 언제부터 우리에게 백두산이 중요한 표상이 되었는지, 또 백두산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때이다. 《고려사》에서 “성종 10년에 압록강밖에 있던 여진족들을 축출하여 백두산 밖에서 살게 하였다(권3 세가3)”고 하였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했다는 이야기와 묘청이 팔성당에서 백두산 치제(致祭)를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이미 고려때부터 백두산 숭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산악숭배가 있었지만 국가 제사를 법제화할 때 백두산은 강역내에 있는 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세종실록》에서는 “높은 산줄기가 백두산에서부터 솟았다 낮았다 하면서 남쪽으로는 철령까지 천여리나 뻗어내려갔고 북쪽으로는 야인이 사는 지경까지 잇닿아있다.”(권155, 지리지)고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었다. 마천령, 철령으로부터 남으로 내려가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이 되고 다시 지리산에 이르러 끝났다.”(권2, 지리부, 산)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팔도의 모든 산이 다 이 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곧 우리나라 산악의 조종(祖宗)이다.”고 하였다. 고려, 조선 전기의 문헌에 보이는 백두산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이다. 우선 백두산은 변방, 북방 경계의 지표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 또 백두산을 한반도의 조종(祖宗)의 산으로 표상화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백두산 정계비(1712년, 숙종 38년) 건립으로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영조 37년(1760년)에 백두산은 국가 제례의 대상이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산으로 인식되어 백두산과 그 주변지역이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청나라가 백두산을 시조의 발상지로 신성시하고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그 주변 지역에 살았던 여진 부족인 장백산부(長白山部) 또는 장백산삼십부(長白山三十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나라나 청나라가 ‘흥왕지지(興王之地)’로 인식한 산이다. 청태조 탄생 이야기는 고구려 신화와 매우 유사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里山)이 있고 산밑에 연못이 있는데 포이호리라고 불렀다. 천녀(天女) 셋이 있어 맏이를 사고륜(思古倫) 다음을 정고륜(正古倫) 막내를 불고륜(弗庫倫)이라고 했는데 이 연못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쳤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을 막내의 옷에 떨어뜨렸다. 막내가 이를 입에 넣자 홀연 뱃속으로 들어간 후 이내 임신이 되었다. 막내는 두 언니에게 내 몸이 무거워 날아오를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두 언니는 우리들이 선적(仙籍)에 배열되어 있으나 걱정할 것 없다며 이는 하늘이 너에게 임신을 시킨 것이니 출산 후에 와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날아가버렸다. 불고륜(弗庫倫)은 드디어 한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나면서 말을 했고 형체와 모양이 기이했다. 이 아이가 장성하자 어머니는 붉은 과일을 삼키고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애신각라(愛新覺羅)로 너의 성(姓)을 삼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里雍順)으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하늘이 너를 탄생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해서 다스리도록 함이니 너는 물흐름을 따라가라고 하며 작은 배를 띄운 뒤 태우고, 어미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이 탄생 신화는 주몽 신화에서 하백의 딸 유화, 선화, 위화의 세 자매가 목욕을 하다가 한 처녀가 임신하게 된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다만 누르하치의 탄생지는 장백산이라고 하였는데, 백두산의 이칭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1, 《삼국유사》 고구려조의 이야기에서 시조 탄생과 관련하여 ‘태백산’이라고 하였고, 태백산은 오늘날 백두산으로 비정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삼위태백(三危太伯)’,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에서 일연(一然)은 ‘태백은 곧 지금의 묘향산’이라고 하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삼국유사》의 태백산=묘향산설을 반박하였는데, 그 근거는 조선후기 안정복의 태백산=백두산이라는 주장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1909년 나철은 단군교를 세우고 신채호의 설을 근거로 단군이 강림한 곳은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여 단군의 활동 무대를 만주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주장은 대종교인들 뿐 아니라 소위 민족사학자들로 불리는 지식인들의 학문적 뒷받침이 되어 백두산을 단순히 산악의 기원에서 나아가 민족의 기원, 역사의 시원 공간으로 여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일본의 영산(靈山=富士山) 담론의 영향,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을 통해 더욱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늘날 백두산을 수식하는 민족의 영산(靈山), 민족의 성산(聖山), 성지(聖地)라는 용어는 이 시기에 형성된 근대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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