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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병을 고치고 병은 약을 다스리니
news letter No.603 2019/12/3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는 매우 소중한 지면이다. 아마도 필자가 유난히 그런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겨우 몇 줄을 쓰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照顧脚下... 평소 감추어 둔 나의 문제의식을 어디까지 내보이며 소통할 수 있을까. 게다가 언제부터인지 말이나 글로써 제 생각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버겁게 느껴져 왔다. 비교적 가까운 친지들과 생각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집담회에 참석할 때는 더욱 더 그러하다. 내 자신의 뜻[의도]과 언행 사이의 괴리, 내가 전달하고자 한 의미와 상대방들이 받아들인 의미 사이의 거리, 그 사이공간에서 절룩거리는 자신의 行步를 알아차리게 되면, 그렇게 어긋나 있는 상황을 알고서도 제 논조를 유지하려는 의욕은 많이 줄어드는 것 같다.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정기 심포지엄이 11월에 있었다. 당시 발제자로서 필자는 우리 종교인이 이타적인지를 묻고 대형교회 등 종교기관이 사회복지자원을 가지고 권력화 되어가는 내부· 외부의 기제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어쩌면 ‘종교권력화’ 자체가 오래된 현상이라 얼핏 보아서는 문제가 없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개명한 사회에서 지성적인 신자들이라면, 자기가 속한 교회[사찰 등 통칭]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을 차별적으로 지배하거나 교회권력의 갈등을 야기하는 종교지도자에게 어떤 대응을 해야 옳을까.
일반사회에서 나름대로 유능한 엘리트라도 자기 교회와 성직자의 是是非非에는 둔감하고 수용하고 침묵하는 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이 종교문화인가.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동안 도심광장의 정치적인 무대에서, 선동인 듯 선교인 듯, 곡예를 부리는 목사님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적지 않게 있어왔다. 한편으로 불교계에서도 지도부 스님들이 음으로 양으로 정치권력과 유착함으로써 사익을 도모하고, 종단 내 권력다툼과 파벌의 행태를 보인 것에 대해서 적폐청산의 요구가 있어 왔다. 그런 權僧에게 自淨의 결단을 요구하는 재가불자들에 맞서서 권승들을 비호하는 재가불자 무리가 있는 것도, 서로 비슷한 종교계 현실이다.
오랫동안 필자가 종교 연구자인 동시에 종교인으로서 지켜봐 온, 우리 종교계 현상들이 최근에는 서글프게도 느껴진다. 마치 야만적 祭儀처럼 보이는 광장무대에서 길길이 날뛰는 목사들이 과연 기독교인인지, 스스로 뒷골목 거래자가 되어서 존엄한 제 빛을 잃은 無明의 걸사들이 과연 불교인인지, 그 이편에서 지금까지 나는 어떤 명분에 묶여 헛공부를 하였는지, 도저히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입장에서 무력감이 크다. 혹자는, 오늘날 한국 종교계의 反종교적 사태가 정점을 찍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스스로를 혁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관의 끝에서 나온 반어법인지, 진정한 낙관인지, 여하간 전망의 섣부른 좌절이 아니라 지혜로운 침잠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맥락에서든지 모든 종교가 참으로 종교다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필자는 잠시나마 마음의 갈피를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불교 선사들의 공안[화두]을 엮은 <碧巖錄>의 한 줄을 다시 읽고 여기에 소개한다. 藥病相治 盡大地是藥, 약은 병을 고치고 병은 약을 다스리고 온 세상이 다 약이다.... 정치인들과 함께 도심의 무대공연에 심취한 목사들이 몹시 부끄러운 개신교인이나,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오직 자기의 이권에만 눈 밝은 스님들이 너무 부끄러운 불교인이나, 스스로 종교인이지만 아직 충분히 종교적이지 않음을 반성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음미하고 싶은 구절이다. 오늘날의 종교불만족이야말로 종교인 각자에게는 더 殊勝한 종교적 경지를 증득할 길이 될 수 있고, 그 길은 이미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라고 새겨본다.
이혜숙_
금강대학교 초빙교수
논문으로 〈불자 신행교육의 평가를 위한 예비적 고찰〉, 〈불교계의 청소년지원을 위한 정책적 제언〉,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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