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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70호-표고버섯과 강아지의 시간 여행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3. 23. 17:45

표고버섯과 강아지의 시간 여행

 

news letter No.670 2021/3/23  


 

 


일주일 전에 표고버섯 종균을 주입하는 일을 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기후와 토양을 잘 아는 어느 분의 배려로 참나무에 구멍을 내고 종균을 주입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분의 문중 산자락에는 이미 표고버섯이 움튼 참나무 수십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근처에 굵직한 참나무 기둥이 잔뜩 쌓여 있었다. 80그루 참나무 표면에 1000여 개의 구멍을 내고 종균을 주입하는 일은 4명이 달려들었어도 한나절을 모두 바쳐야 끝이 났다. 종균이 주입된 참나무 기둥은 우물 정자의 형태로 쌓아 차광막으로 덮어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까지 내버려 둔다. 그러면 그 즈음에 움튼 표고버섯은 사람의 손에 뜯겨도 4년 정도는 그 안착한 자리에서 다시 움튼다고 한다. 참나무 열 그루는 내 몫이고 한 번의 수고가 4년간의 혜택으로 이어진다니 하루가 아깝지 않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누구에게 표할까? 내 몸, 참나무, 표고종균, 혹은 이 일에 나를 끌어들인 인생 선배일까? 아무튼 표고버섯은 그렇게 한 자리에서 나의 삶을 엮어 놓고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갈게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강아지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채운다. 1년 반 전에 밭 배수로에서 숨어 지내며 동네를 떠돌던 강아지를 받아들였었다. 이미 집에는 키우던 개들이 있었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이 필요한 상황인지라 그 녀석을 집 밖의 비닐하우스에서 살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게 하는 것이 외려 그 녀석에게 못된 짓을 한 듯 마음이 무거워져서 고민 끝에 지난 가을 집에 들여놓았는데, 그만 그 녀석이 후손을 보는 일을 내고 말았다. 낳은 지 40여 일이 되어 간다. 애비 개는 자기 자식들에게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는데 반해 어미 개는 자식에게 지극정성이다. 항상 제 집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여러 마리 새끼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새끼의 배설물을 흔적도 없이 처리하고, 새끼의 울음소리만 들리면 어미 개는 지체 없이 새끼에게 달려간다. 눈동자가 풀릴 만큼 온 힘을 다 쏟아 새끼를 키운다. 나를 놀라게 한 일은 또 있다. 수년간 어미 개와 동고동락해온 다른 암컷 개도 어미 개와 함께 새끼 강아지를 돌보는 것이다. 지친 어미 개를 대신해서 새끼 강아지를 품고 자기도 하며 어미 개와 마찬가지로 새끼 뒤를 따라다니며 돌보는 데 온종일 힘을 다한다. 언뜻 보면 누가 어미 개인지 알기 힘들 정도이다. 이 두 어미의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들은 정신없이 세상을 탐험하느라 분주하다. 얼마 후면 강아지들은 제 갈 길을 찾아 떠난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각각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살아갈 환경도 각기 다르다. 데려가는 주인의 성품을 믿을 수밖에. 그렇게 강아지들은 또 한 차례 나와 세상을 묶어놓고 시간을 내달려 간다.


표고버섯과 강아지가 내게 가져오는 경험의 세계는 이곳의 장소와 떼놓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경험이 특정한 장소의 여러 주체들이 어울려 시간 속에서 빚어낸 결과물이고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꼴이 갖추어 진다면, 그러한 나는 타자들과의 관계에서만 비로소 나로 존재하는 생명현상일 뿐이다. 현상학자 에드워드 케이시(Edward Casey)는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힘을 ‘에지(edge)’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의 사유에서 에지는 요즘 사회에서 유행하는 “엣지 있는 삶”이라는 말에 담긴 ‘개성’이나 ‘멋’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다소 멀다. 그에게 에지는 사물이나 생각, 장소나 사건이 되는 데 필수적인 것이며, 나아가 한 인격이나 작품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특정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형성적인 힘이다. 사람을 한 인격체로, 사건을 하나의 고유한 사건으로, 장소를 하나의 특정한 공간으로서, 시간을 의미로 응결된 질적 시간으로, 사물을 의미 있는 존재로 형성하는 힘이 에지이다. 곧, 일상의 세계를 비일상적인 세계로 변화시키는 힘을 에지라고 한다면, 그 에지는 연금술적인 변용의 힘과도 같고 어쩌면 종교에서 사람들이 갈구하는 성스러운 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절에 굳이 세상의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현실 종교에서 그러한 에지의 효능을 느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에지에 담긴 가장자리, 모서리, 벼랑 등의 뜻을 염두에 두면, 세상의 중심보다는 이렇듯 주변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꽃피는 계절에 강아지와 표고버섯과 함께 펼치는 ‘나의 세계’를 위해 그들의 시간 여행에 좀 더 오래 동행하는 것이 에지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골생활을 낭만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곤란하다. 내가 살아가는 삶은 안빈낙도의 삶도 아니고, 세상을 초월한 삶도 아니다. 단지, 이 계절에 강아지와 표고버섯과 함께 시골구석에서 엮여지는 한 순간의 풍경일 뿐이다. 물론 그러한 풍경에서 생략된 것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나 그러하듯이 고단한 몸과 분주한 마음일 게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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