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노스’, 종교학의 향연을 기억하며 혹은 기다리며
newsletter No.673 2021/4/13
얼마 전 찾아볼 게 있어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강철웅 역, 이제이북스, 2010)을 다시 뒤적이다 역자주 한 곳이 눈길을 끌었다. 비극경연에서 첫 우승한 아가톤의 집에서 벌어진 향연(symposion)에서 에로스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대화에 참여한 에뤽시마코스의 아래와 같은 말에 달린 주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신을 위한 내 몫의 부조(扶助)를 해서 이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고, 동시에 지금 여기 참석한 우리들이 그 신을 영예롭게 하는 게 알맞다고 생각하네.”
성실하고 꼼꼼한 역자는 위 대목에서 ‘부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문 ‘에라노스(eranos)’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부조, 즉 ‘에라노스’는 누군가에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대응을 할 의무가 주어진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이 표현된 말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에라노스는 각 식사자가 자기 몫에서 십시일반 떼어 내놓은 음식의 의미로 씌였고, 후대에는 기부자들이 궁핍한 지인을 돕기 위해 작은 돈을 빌려주는 신용체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는데, 빌려주는 것도 강한 의무였지만 빌린 자가 가능한 빨리 되갚는 것 역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였고, 친구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제도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음식을 나누는 잔치든 경제적 나눔의 기부관계든 에라노스는 주객이 따로 없이 모두가 자기 몫의 부조를 하며 참여하는 호혜적 장에서 누릴 수 있는 향연의 선물이랄까. 에로스 신을 위한 자신 몫의 부조를 하겠다는 에뤽시마코스는 그러한 향연의 자발적 상호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말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종교학 언저리 사람이라면 그랬겠지만, 나도 당연히 칼 구스타프 융, 미르체아 엘리아데, 게르숌 숄렘, 카를 케레니, 하인리히 짐머 등이 가담했던 서구의 유서 깊은 지적 서클 에라노스 학파를 떠올렸다. ‘에라노스’의 뜻을 음미해보니, 1933년 프뢰뵈 캅테인이 오토의 조언을 받아 모임을 시작하여 심리학, 비교종교, 역사, 문헌학, 민속 등 서로 이질적인 분야에 속한 다양하고 생기 넘치는 지성들이 스위스 아스코나 근처 해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서양 요가와 명상, 고대 태양 숭배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빛의 상징성, 인간과 평화, 꿈의 진실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드는 지적 담론을 향유하고 생산해내던 에라노스 학파의 풍토와 에토스가 그려졌다. 20세기 서구 지성계의 거두들을 배출했던 초기 에라노스 학파의 에너지가 계속 지속된 것 같지는 않고, 에라노스 모임의 비의적 성격과 뒷날 파시즘에 경도되거나 가담한 지식인들을 연결시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지난 70년 이상 동안 매년 지속된 에라노스 모임은 폭넓은 분야의 지성들이 경계를 가로질러 교류하고 참여했던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지식인 서클이자 그들의 지적 향연의 역사이고 궤적일 것이다.
서구의 창조적이며 고전적인 종교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서로 다른 영역의 사상가들이 자유롭고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 몫의 부조를 가지고 참여하던 에라노스의 향연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던 것이다. 서구 종교학사에서 에라노스 학파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듯이, 우리 종교학 역사 어디쯤에도 그렇게 잊혀지고 묵혀진, 자유롭게 호혜적인 선물들을 향유하던 또 다른 에라노스들이 있었을 것이다. 에라노스에 대한 주석에서 시작된 이 단상은 그렇게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학문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참여하는 여러 심포지엄의 유래가 된 향연과 에라노스의 의미를 곱씹으며, 이 밤 코로나 속에서 맞이한 새봄과 함께 다가올 종교학의 향연들을 기대해 본다. 플라톤이 그려낸 향연에서 초대받지 않았지만 자격을 갖춘 훌륭한 손님처럼, 자기 몫의 에라노스, 성찬을 차려 그 향연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해보면서.
안연희_
선문대학교 연구교수
논문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형성과 그 종교사적 의미>, <“섹스 앤 더 시티”: 섹슈얼리티, 몸, 쾌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다시 읽기> 등이 있고, 저서로 《문명 밖으로》(공저), 《문명의 교류와 충돌》(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