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에 나타난 노인에 대한 시선
news letter No.690 2021/8/10
필자는 지난 두 해 동안 우수하고 또 성실하신 연구자분들과 함께 ‘동아시아 종교의 노년 담론 및 실천’이라는 제목의 공동연구를 해왔다. 담론과 실천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2차년도의 과제인 ‘실천’의 영역을 공부해 나가면서, 그간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의 전통문화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인 ‘양로’를 포함하는 ‘경로’1)의 사상과 실천 및 그 제도적 측면을 의문의 여지없이 유교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유교의 경서 안에서 지나치리만큼 강조되었고, 또 조상 제사를 비롯하여 유교 문화권의 일상생활에 깊이 각인되어왔던 ‘효’를 매개로 하여 ‘경로’는 유교 전통의 특성이라고 여겨왔을 테지만, 효든 경로든 유교 전통과만 관련시켜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인류 보편의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 전통과의 친밀성을 강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잠시 차지하고, 필자는 흔히 법가나 잡가로 분류되어 왔던 《관자》라는 텍스트에 놀랄 만큼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에 대한 보살핌에 관하여 간략하게 서술해보려 한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숙어로 친숙한 관중은 《논어》 안에도 네 차례나 등장하는데, <팔일>편에서 공자는 관중이 예를 모른다고 비판했으나, <헌문>편에서는 관중으로 인하여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고도 하고, 심지어 인(仁)하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관중에 대한 이같이 엇갈리는 평가는 《논어》의 편집 과정에서 <헌문>편 등 하론(下論: 《논어》의 11-20장)의 일부 편장이 제론(齊論: 제나라 《논어》)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많은 제자백가의 텍스트가 그렇듯, 《관자》도 관중이라는 한 개인의 저작은 아니며, 관자의 제자들이나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추종자들이 관자의 사상을 골자로 하여 오랜 시기에 걸쳐 편집되었던 것이므로, 편의상 관자학파의 저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공리주의적 성격이 강한 《관자》를 법가류로 분류하고 있으나, 전국 말에서 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편찬된 대다수의 문헌과 마찬가지로 《관자》 역시 제자백가의 다양한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잡가적 성격의 문헌이며, 적어도 유가류로 분류되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관자》에서 노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유가의 문헌들 못지않게 자상하며 따듯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자》<입국(入國)>편은 주목할 만하다. 그 모두에서 관중이 제나라에 들어가서 시행했다는 아홉 가지 시혜 정책을 열거한 후에, 그 각각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입국>편은 요즘의 용어로는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에 대한 입론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아홉 가지 중의 첫 번째가 바로 ‘노인을 노인대접 하는 것(老老)’이다.
이른 바 ‘노인을 노인대접 하는’ 방법으로 조정에 양로를 관장하는 장로(掌老)라는 관직을 둔다. 7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아들 한 명의 정역(征役)을 면제하고 3개월마다 고기를 준다.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아들 두 명의 정역을 면제하고 달마다 고기를 준다.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집안 모든 사람의 정역을 면제하고 날마다 술과 고기를 준다. 죽으면 나라에서 관곽을 제공한다. 자제들에게 권하기를,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고 노인들에게 하고자 하는 것을 물으며, 좋아하는 것을 구해드리도록 한다. 이를 노인을 노인대접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홉 가지 시혜 정책 중 여섯 번째에 해당되는 ‘병자 위문[問病]’은 자연스럽게 ‘노인대접’과 연결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조정에 병자를 관장하는 장병(掌病)이라는 관직을 두어 백성 중에 병든 사람을 직접 문병하게 하는 것으로서, “90세 이상의 노인은 날마다 한 번 문병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은 이틀에 한 번 문병하며, 70세 이상의 노인은 사흘에 한 번 문병한다”고 되어 있다.
《관자》에 노인이 단지 시혜의 대상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노인에 대한 공경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는 관리를 천거할 때의 기준으로서 등장할 뿐 모든 이들이 지켜야 하는 윤리적 덕목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대광(大匡)>) 또 주로 구체적인 심신의 수양에 관한 편장인 <내업(內業)>에는 “나이가 들면 생각을 적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곤하여 생기가 고갈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 40번 가량의 노인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위정자가 노년층을 배려하고 보살펴드려야 한다는 내용으로 종종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인 ‘환과고독’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관자》의 미덕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자 부모의 은혜를 떠올리면서 자기 살을 깎아내듯이 효를 실천하는 식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약자를 통치자들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층을 보살피는 관직을 마련하고 제도화의 수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보이기 때문이다.2) 경로가 진정한 경‘로’이기 위해서는 노년층 일반에 대한 합당한 ‘노인대접’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자》를 읽으면서 필자는 고대 중국에서 노인에 대한 보살핌이나 구제의 활동 및 그 제도화의 맥락을 유교적 전통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벗어나서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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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맥락에 따라서는 양로와 경로가 상대적인 것으로, 즉 전자는 물리적인 봉양이고, 후자는 정신적인 공경을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사실에 기초하여 생각해봐도 경로는 양로를 포함한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유가 경서인 《주례》에도 대사도(大司徒)의 직책으로 양로가 언급되고 있기는 하다.
이연승_
서울대학교 교수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