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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99호-권력과 권위, 그리고 종교학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10. 12. 19:40

권력과 권위, 그리고 종교학


 

news letter No.699 2021/10/12







학부 시절 1학년 1학기 전공과목인 정치학 개론 첫 학기 시험 문제는 ‘권력(power)과 권위(authority)’에 대한 물음이었다. 교수는 강의 시간에 이 둘의 구분을 지위의 정당성에 대한 집단구성원의 자발적 동의를 중심으로 ‘환자에 대한 의사의 권위’와 ‘정치가의 권력’을 사례로 설명했다. 우리는 정치외교학과 입학 후 치른 첫 번째 시험의 답안지를 돌려받았다.

수 개월 전,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30 여 년이 흘러 빛이 바랜 2절지 종이에 가득 채워진 스무살 사유를 목도하였다. 한참 동안 그 답안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마치 남의 글을 훔쳐 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공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혈관 안에 새겨진 지성의 원형 세포라도 찾은 것 같은 그날의 흥분은 한동안 이어졌다. 답안의 핵심은 이렇다. 권위에 대한 집단 구성원의 자발적 동의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집단에 소속된 개인의 생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또한 인간의 ‘힘에 대한 욕구’는 무한히 나아가기에 힘의 극대화에 대한 견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학은 힘의 균형과 재분배를 위한 역사적·과학적 분석을 기반으로 권력의 문제에 접근할 때, 인간의 삶에 실재하는 권위로 작용한다. 스무 살의 나는 단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마흔이 넘어 새로 종교학을 시작했을 때, 새로운 학문에 들어간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학문 내의 힘의 균형과 권위 하에 내가 문제의식으로 삼았던 이슈들은 한참 동안 내려놓아야 했고, 대신 생소한 종교학 이론과 학자 이름들 앞에 마주했다. 나는 수험공부하듯이 종교학 사전을 찾아가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때 서야 종교학 기본서는 읽고 들어왔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종교학 전공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신학 공부와 내가 속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오히려 ‘원죄’처럼 느껴졌다. 마치 통과의례 과정에서 다음 단계에 들어서고 나서야 전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과도 같다. 석·박사 과정 내내, 나는 ‘학문적 공황’(academic panic) 상태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 정신세계 안에서 펼쳤던 권력과 권위에 대한 주체적인 사유는 고이 접어놓은 빛바랜 깃발과도 같았다.

인간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는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권위에 대한 개념을 넣어 사유할 때 현실성을 갖는다. 권력과 정치현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학부시절의 전공에서 탈정치화 했던 시절, 다시 전공을 바꾸어 학부 이상의 긴 세월을 보내고 난 지금, 나의 선택은 내가 소속된 집단 안에서 고유한 자유의지를 통해 이루어졌을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선택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인지 작용’이라는 설명이 내겐 더 설득력이 있다. 박사 취득 이후, 내 안의 힘이 재분배되고 균형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권력과 권위에 대한 최초의 언어를 찾았다.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들어가고 나서야 대면하는 생경한 언어는 종교체험 못지않게 강경함을 인지한다.

코로나 시대에 한국은 대선 정국에 들어서 있다. 언론에서는 연일 차기 대선 주자들에 대한 보도가 넘친다. 여야 모두 공정과 상식, 정의를 말하며 국민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자 한다. 이러한 현실의 텍스트를 통해 나는 누가 힘의 균형과 분배 앞에 놓인 ‘민(民)’의 생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생존을 담은 아젠다를 산출해 가는가를 들여다본다. 정치인 개인의 삶의 궤적과 실존 방식이 지속적으로 드러나며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국민의 생존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조작을 통한 권위의 획득이 아닌, 민(民)의 의식 안에 잠재된 정의와 공정을 느끼게 하는 자가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국가의 생존 방식이 된다면, 한국의 정치는 분명히 진화한 것이다.



 







 


최현주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자 인문학 전자책 출판사인 독립출판 CB (Crossing Boundaries Publications) 대표를 맡고 있다. 2021년 Kenneth H. J. Gardiner et al. Perspectives on the Silk RoadEastern Silk and Western Gold: Early Chinese Contacts with Central Asia 를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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