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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토코바의 성모: 원본과 복사본, 물질적 이미지의 힘

 

 news letter No.700 2021/10/19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벅스 카운티(Bucks County)의 소도시 도일스타운(Doylestown)에서 북서쪽 피스 밸리 공원(Peace Valley Park)으로 가다 보면 약간 경사진 언덕길이 나오고 주변의 전형적인 평범한 미국 교외의 집들 풍경 앞에서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체스토코바의 성모 성지 성당(Shrine of Our Lady of Czestochowa)”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원래 체스토코바는 유럽의 폴란드에 있는 도시다. 성 바오로 은수자회가 14세기 이 도시의 ‘빛의 언덕, 야스나 고라(Jasna Góra)’에 세운 수도원에는 ‘체스토코바의 성모’라 불리는 성모자 이콘(성화상)이 있으며, 이 이콘은 폴란드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여러 기적과 결부되어 수많은 순례자를 불러 모았다. ‘체스토코바의 성모’는 폴란드 가톨릭을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며, 따라서 폴란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북미 지역에서 ‘체스토코바의 성모’ 이름을 딴 성당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도일스타운의 경우 특별히 폴란드 이민자가 많은 곳도 아니고 게다가 일반적인 성당(church)이 아닌 ‘성지 성당(shrine)’이기에 조금 더 특별하다. 가톨릭 전례사전에 의하면 ‘성지 성당’은 “성지 순례가 이뤄지는 거룩한 장소나 성당”이며, 성스러움의 발현과 연관된 어떤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순례자들을 모으는 순례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국 동부의 한 소도시에 폴란드 가톨릭 순례지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성 바오로 은수자회 소속 폴란드인 사제 젬브르주스키(Zembrzuski, 1908-2003)는 1951년 미국에 온 후 도일스타운 근처에 땅을 사고 수도원을 세우는 것을 수도회로부터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수도원을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곳에 폴란드의 성지 체스토코바와 같은 순례지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폴란드 출신 건축가를 고용해서 야스나 고라와 비슷한 언덕에 성지를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기에 여러 도시를 돌며 폴란드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후원을 받았다. 이때 후원자들에게 이곳이 폴란드 가톨릭의 성지가 될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던 것은 바로 그가 폴란드에서 가져온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 복사본이었다. 젬브르주스키가 폴란드로부터 가져온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의 복사본은 미국 여러 도시에서 열린 후원금 모금 사업에 등장했고 마침내 1966년 10월 도일스타운의 성지 성당이 세워졌을 때 여기에 안착되었다. 즉 미국의 체스트코바를 성지 순례지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이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의 복사본이었다.

사실 일종의 ‘복사본’이 ‘원본’을 대신해서 성지를 구축한 예는 이미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예루살렘 순례가 불가능해졌을 때 유럽의 많은 교회는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작은 모형을 교회 안에 만들어 놓고 이곳을 ‘성지’로 간주했다. 예루살렘의 (‘진짜’라 믿어진) 십자가 조각, 흙 등이 성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유럽에 많은 다른 성지를 생산했다면, 성묘교회의 모형 역시 ‘닮음’을 통해 다른 성지들을 만들어냈다. 이미 오래전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가 (프레이저(James G. Frazer)의 개념을 사용해) 지적했듯이, 닮음(유사성)과 접촉(인접성) 혹은 은유와 환유는 그리스도교에서 성스러운 장소를 다른 곳에 옮기는 대표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은 성모가 한팔로 아기 예수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인데 이러한 이콘을 보통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길을 보여주시는 자)’ 이콘이라 부른다. 호데게트리아의 기원은 성 루카가 직접 성모와 아기 예수를 보고 이를 그렸다고 하는 전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아케이로포이에타(acheiropoieta,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그 기원을 인간이 아닌 신에게 둠으로써, 이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호데게트리아 이콘의 대부분은 그 기원을 성 루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지만, 체스토코바의 성모 이콘의 경우처럼 대개 8세기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진 이콘이거나 그것의 복사본일 경우가 많다. 즉 사실 호데게트리아 이콘의 경우 ‘원본’이라는 것은 어떤 상상의 실체일 뿐 대부분 ‘복사본’으로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에서처럼 호데게트리아 이콘의 복사본은 마치 원본처럼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내고 순례자를 불러 모은다. 복사본이 원본과 똑같은 성스러움을 만들어내는 현상은, 성스러움의 근원을 끊임없이 우리 눈 앞의 물질이 아닌 또다른 존재(원본)와의 연관성 속에서 찾고자 하는 신학적 논의와 묘한 대립, 긴장관계를 이루며, 사실상 인간이 물질적 이미지 앞에서 어떤 성스러움을 경험한다면, 이는 저 너머 원본, 신적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이 물질적 이미지 그 자체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마치 “인간 주체가 사물에 부여하는 맥락으로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그것들의 기호로 절대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생생한 실체”(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43쪽)가 만들어내는 힘처럼 말이다.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이콘은 성모와 아기예수가 어두운 피부로 표현된 소위 ‘검은 성모’로서 아이티인들 사이에서는 부두교의 영, ‘르와(lwa)’ 중 하나인 ‘에질리 단토르(Ezili Dantor)’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깊게 받은 부두교 (혹은 부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이티의 로마 가톨릭)에서는 많은 르와가 가톨릭의 성인, 혹은 성모와 동일시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체스토코바의 성모는 아이티 혁명시 프랑스군을 위해 투입된 폴란드 군인들을 통해 아이티에 전해지면서 아이티인들의 신앙 속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 군인 중 일부는 프랑스군을 등지고 아이티인들의 편이 되어서 함께 싸웠다는 점, 에질리 단토르는 아이티 혁명의 상징적 르와라는 점 등이 체스토코바의 성모를 에질리 단토르와 연결시키는 이유가 되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체스토코바의 성모 이콘의 어두운 피부, 얼굴에 있는 상처 자국, 팔에 안고 있는 아이의 모습 등이 그들이 상상하는 어머니, 전사, 아이들의 보호자로서의 에질리 단토르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 펜실베니아 주 체스토코바 성지를 찾는 이들 중에는 폴란드계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아이티인들도 상당수라는 것은 성지라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힘들과 상징들이 때로는 결합 때로는 상충하는 곳이며, 나아가 이러한 복잡한 망(web)을 만들어내는 배경에는 특정한 물질/사물의 힘과 이를 둘러싼 여러 다른 인간 및 비인간 행위소들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내는 논리는 ‘닮음(유사)’과 ‘접촉(인접)’ 혹은 기호와 상징 등 인간이 고안해 낸 의미의 논리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지만, 비인간 물질적 행위소의 힘을 중심에 놓고 이들과 다양한 다른 인간/비인간 행위소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배치를 좀더 중점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이는 전과는 다르게 논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점술의 사유와 이미지 사유>,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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