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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01호-음영(陰影) 예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10. 26. 18:49

음영(陰影) 예찬

 

news letter No.701 2021/10/26






광고를 피하려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중국 드라마를 보게 되는 때가 있다. 대부분이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무협극이거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인네들의 암투극이다. 무협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목표를 향해서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의 관심은 우리의 주인공을 저렇게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 그게 열에 아홉,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앞으로도 그럴까? 좀 달라지지 않겠나 생각한다. 요사이 중국처럼 급변하고 있는 세상도 없고, 중국의 가족도 예전 같지 않으니 아무래도 드라마 설정이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중 암투극은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는 음모(陰謀)를 따라가기 피곤하고, 내용이 뻔하기 때문에 보기가 지루하다. 주인공이 지고지선한 인물로 나오면 더욱 지루해져서 어쩔 수 없이 채널을 돌리지만, 상대방에 맞서 악랄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없던 관심이 생겨나 좀 더 보곤 한다. 착하기만 한 주인공임에도 참고 보게 되는 경우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궁궐 건축과 궁중 소품을 살피거나, 옛날 조명의 은은함을 느낄 수 있는 때이다. 특히 요즘 전등불과는 달리 여러 촛불이 주는 음영(陰影)의 풍요로움은 그야말로 심금(心琴)을 울릴 정도여서, 매번 장면 바뀌는 것을 아쉬워하게 된다. 밝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이 빛의 중간지대는 그 자체에 깊은 입체감을 지니고 있어서 선악 이분법의 경거망동이 나올 수 없게 만든다. 쉽게 판단하고 손을 털어내는 대신, 멈춰서서 침잠하게 만드는 힘이 거기에 스며 있는 듯하다.

그 반양(半陽) 반음(半陰)의 진정 효과 때문인가? 궁중 암투극도 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등장하는 물음은 시기와 모함, 그리고 음해의 온갖 술책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인네들의 사악함을 어찌 그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 있다면 아마도 열에 아홉, 혹은 누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온전히 제로-섬(zero-sum) 게임의 조건이고, 그 성패의 가늠자가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면 여인네들의 최선을 다하려는 삶이 경쟁자에 대한 저주와 모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기면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잠시의 영달을 누리는 것이고, 지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 깨끗이 몰락해 버리지 않는가? 모함하지 않으면 거꾸로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저주를 퍼붓고 경쟁자를 끌어내리는 행동을 했다고 누가 그들을 매도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악함을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조건을 그대로 놔둘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듯 한껏 아량(雅量)을 확장하니, 조금 전 저녁 뉴스에 등장하여 속을 뒤집어 놓던 이른바 대선주자들의 꼴불견도 조금 달리 볼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없는 출마 명분은 고사하고, 쏟아내는 말이나 주워 담는 말에서 조금이라도 음미할 만한 식견은 찾을 수가 없던 그들이다. 자신의 ‘격’을 되돌아보는 일은 평생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 무관심하며, 상대방을 비방하는 일에는 이를 악물고 눈빛을 번뜩이며, 생동하는 기운이 불붙듯 하던 이들이다. 그들의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아무리 관대하게 보더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준이다. 삼업(三業) 가운데 의업(意業)은 차마 그들에게 적용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들의 상호비방 방식과 내용은 미성년자가 접하기 부적합한 유해 콘텐츠에 속한다. 도처에서 우리 모두의 짜증을 유발하기에 미성년자에게만 해로운 것일 수 없다. 그들은 도대체 왜 느닷없이 등장해서 ‘우리’의 평상심을 흔들고 교란하는 것인가? 그들은 왜 지옥에 떨어질 자신의 업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의 눈먼 장님 행세를 하는 것일까?

비빈(妃嬪)의 반열에 올라 황제의 환심을 다투는 상황에 있게 된 것이 그들의 조건과 의지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일이듯이, 대권주자의 반열에 올라 국민의 투표심을 놓고 다투게 된 후보들은 자신의 조건과 의지를 결합하여 목표 달성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황제의 변덕스런 마음을 예측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대권의 변덕이 정기적으로 5년 주기로 변한다는 것은 피차 다 알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변덕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 ‘승자독식’이 허용되기 때문에 마지막 고비를 넘어 독식을 꿈꾸는 대권주자의 열망과 조바심은 결코 후궁들에 못지않다. “최후의 고지가 바로 앞에 있다.”고 외치면서 정신 내놓고 골몰하기에 가뜩이나 부족한 그들의 상식은 더욱 고갈되어 버린다. 이제 그들은 몰상식의 판에 뛰어들어 이전투구, 즉 진흙탕의 개가 된다.

흙탕에 뒹굴어 몸이 더럽게 되고, 상대방에 진흙을 던져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떳떳함을 잃지 않는다. 뱃속에 깊이 감춰진 자신의 창자가 백주에 드러나도 거리낌이 없다. 후궁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모를 견디어 냈지만, 이른바 대권주자들은 자신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짊어지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아예 인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버티는 것이 뻔뻔함이라고 한다면, 알기 전에 아는 것을 미리 차단하는 것은 뻔뻔함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저절로 둔감한 것과 의지적으로 둔감한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뻔뻔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수준을 얕잡아 본 것일 수도 있다.

후궁의 사악함을 그들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권주자들의 몰상식과 불감증(不感症)이 그들의 탐욕과 천박성에만 기인한다고 말할 수 없다. 후궁의 암투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권력 게임의 일부라고 한다면, 대권주자들이 자행하는 제 얼굴 및 남의 얼굴 침 뱉기의 꼴불견은 투표하는 국민을 놓고 벌이는 한 자락의 예능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게임에서 대권주자들은 으스대는 겉모양과는 달리 장기판의 말 신세에 불과하다. 게임판에 들어온 이상,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게임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게임 법칙인가? 그것은 대의제(代議制) 시스템이 부여한 법칙으로 민심을 대신하는 자는 정기적으로 점검받아야 하며, 그 사이에도 권력을 위임받은 각종 대표자를 견제하기 위해 상호비판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게임 법칙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바쳐서 민심을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십자포화가 겹치는 지점에 설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발가벗어 자신의 내장까지 다 드러내야 하며, 위임받은 권력 소유자끼리의 아귀다툼을 용인하며, 그런 이전투구로 인한 온갖 상스러움을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다면 그동안 혐오감과 짜증을 일으키던 대권주자들을 좀 다르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대의제도의 영웅처럼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측은하게 여길 만하지 않은가? 대선주자로 나선 자들이 의식하든 아니든 그들은 ‘희생양’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지금 자신이 누리는 조건에서 편히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에 홀린 듯 지옥 안에 들어와 헤매고 있다. 상대방에게 인격 모욕과 비방을 가하는 만큼, 자신도 조롱과 수모를 견디고 있다. 이럴 줄 몰랐다면 무지한 거고, 이미 알았다면 희생양을 자처한 것이다. 우리의 대권주자들을 무지한 종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이 장기판의 말로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림자의 입체감이 살아있는 옛 조명의 분위기 속에서 생각을 펼친 덕분에 그동안 혐오스럽기만 하던 대권주자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은 ‘사이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그림자를 생각하며 붙인 것이다.



 







 


장석만張錫萬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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