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의 개념사를 위하여
news letter No.709 2021/12/21
지난 9월 4일, 필자가 소속된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는 세교연구소 등과 함께 “개벽의 시선에서 다시 쓰는 한국근현대사상사”라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기획과 조직을 세교연구소에서 맡고 우리 쪽은 주로 사회와 토론에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필자 또한 철학 분야 박소정 선생님 및 역사 분야 허수 선생님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 학계 경험이 일천한 필자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 발표가 모두 논의의 출발점에서 필자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논문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름 아닌 ‘개벽의 개념사’였다(박소정 2021; 허수 2021; 한승훈 2018). 말할 것도 없이 ‘개벽’은 한국종교사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이 단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그 의미가 변형, 확장되어 왔다. 따라서 보다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 우리는 ‘개벽’이라는 말을 느슨하게 본질화하기보다는 ‘철저히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장석만 2017, 179; 벤느 2004, 230-231).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근현대의 개벽사상은 동아시아의 고전적 우주론과 운수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소옹(邵雍)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조선시대에 도입되어 여러 신종교의 핵심적인 교의를 구성하게 되었다(황선명 2004, 328; 윤승용 2017. 153-160). 필자의 2018년 논문은 이 설명에서 ‘빠진 고리’를 조선후기 종교사에서 찾아보려 하였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개벽’이라는 단어를 다음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① 세상이 처음으로 생겨 열림, ②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힘, ③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우주창생론(cosmogony)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묵시종말론(eschatology)의 연속적인 두 국면을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절대 다수의 전근대 용례에서는 ①의 의미만이 나타나고, ②, ③의 의미는 근대 이후에 일반화되어 일상 언어에까지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다른 한자문화권 지역들 사이에도 명확한 차이가 드러난다. 사전, 언론매체, SNS 등에서의 용례를 비교해 볼 때, 한국에서는 묵시종말론적인 개벽 개념이 종교 교의를 벗어난 맥락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는 데 비해, 중국과 일본에서는 (용례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오직 고전적인 우주창생적 개벽 개념만이 드러난다. 묵시종말적 개벽 개념은 현대 한국어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물론 여기에는 근현대 한국 신종교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선언하며 동학을 창도한 이래, 증산계 종교들, 원불교 등은 후천개벽, 정신개벽 등의 교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은 과거의 우주창생적 개벽과 구분되는 새로운 개벽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는 가까운 미래에 도래하거나, 이미 시작된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송대 신유교에도 다음번에 일어날 개벽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옹의 원회운세설이나 주희의 논의 속에서 하나의 원(元)은 129,600년 단위로 순환하는 것이었고, ‘다음 개벽’까지는 적어도 수만 년의 시한이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코 임박한 종말이나 신시대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새로운 개벽이 일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전망도 구체적이거나 일관적이지 않았다(한승훈 2018, 216-218). 그러나 이 관념이 동아시아의 지성사적 토양 속에 순환적 우주론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를테면 청대 원매(袁枚)의 『자불어』에 실려 있는 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에 의하면 소옹이 말하는 원회(元會)의 순환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의 원(12만 년)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반고(盤古)가 태어난다고 한다(『子不語』 권5, 「奉行初次盤古成案」). 이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개미처럼 많은 인드라”에 대한 힌두 신화와 완전히 대응된다. 우리의 논의와 직접 관련되는 다른 사례는 아직까지 조선후기 문헌에서만 확인되는 “개벽(改闢, ‘開’闢이 아니다)” 또는 “재개벽(再開闢)”이라는 표현들이다. 17세기 초에 안변부사로 있던 이수광(李睟光)은 이 지역에 큰 홍수가 일어나 참혹한 피해가 발생하자 “천지가 개벽(改闢)하려 한다”고 기록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두경(鄭斗卿)은 이 쿠데타를 “하늘과 땅의 다시 개벽[乾坤再開闢]”이라고 찬양했다. 18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왕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이 “혼돈개벽(混沌開闢)”이라 주장하며, 이것을 “개벽(改闢)”이라 불렀다. 이 단어는 신유교옥 당시 정계를 뒤흔들어놓았던 「황사영백서」에도 등장한다. 정약종(丁若鍾)이 한때 선(仙)을 배워 장생하려 했다가, 천지가 “개벽(改闢)”하는 때가 되면 불사의 신선들도 소멸한다는 말을 듣고는 흥미를 잃고 천주교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대목에서다. 필자의 연구는 고전적 개벽 개념과 근현대 개벽 개념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시대는 직접 다루지 않았다. 박소정과 허수의 논의는 정확히 필자가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다. 박소정은 수운-해월-의암의 언설을 통해 동학공동체 내에서 개벽 개념이 어떻게 변모, 확장되어 갔는지를 다루었다. 한편 허수는 최제우의 “다시 개벽”이 담고 있는 정치적 불온성이 교조 처형 이후의 트라우마로 인해 잠복되어 있다가, 1920-30년대 천도교 혁신파에 의해 ‘개조’나 ‘혁명’과 같은 당시 유행하던 개념들과 결합하며 대두한 양상을 지적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학농민전쟁 당시 자료에서 개벽이라는 말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유라는 주장이다. 후대의 회고에서는 대표적인 ‘개벽 상황’으로 이해되는 농민전쟁 국면에서 정작 ‘개벽’이라는 개념은 부재했던 셈이다. 종교학, 역사학, 철학 분야를 망라하는 연구들로 이제 개벽의 개념사는 그 대략적인 밑그림이 그려졌다. 앞으로는 여백을 채우고 다채로운 색채의 변화를 확인하는 일이 따라야 할 것이다. 특히 동학 이외 신종교들에서의, 그리고 해방 이후의 개념사는 아직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허수는 근대 이후 개벽 개념의 잠재적 ‘불온성’이 지식의 장에서는 점차 배제되어 갔지만, 신종교와 같은 “근대적 언어질서의 변방”에 위치하면서 오히려 보존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리고 다른 근대적 개념들(이를테면 ‘혁명’)이 진보성을 의심받을 때 문화 저변을 복류(伏流)하던 개벽의 불온성은 다시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된다(허수 2021, 265-266). 분명 이런 문제에는 종교학이 답해야 할 영역들이 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개벽’ 이외에도 개념사적 검토가 필요한 주제들이 차고 넘친다.
----------------------------------------------------- 박소정, 2021, 「동학공동체의 ‘철학적 근대’ ― “개벽”개념의 성립과 계승 및 변용을 중심으로 ―」, 『한국철학논집』 71. 벤느, 폴, 2004,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새물결. [Paul Veyne, Comment on écrit l'histoire. Essai d'épistémologie.] 윤승용, 2017, 『한국 신종교와 개벽사상』, 모시는사람들. 장석만, 2017, 『한국 근대종교란 무엇인가?』, 모시는사람들. 한승훈, 2018, 「개벽(開闢)과 개벽(改闢): 조선후기 묵시종말적 개벽 개념의 18세기적 기원」, 『종교와 문화』 34. 허수, 2021, 「근대 전환기 ‘개벽’의 불온성과 개념화 — 동학⋅천도교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78/4. 황선명, 2004, 「정역으로 본 개벽 사상과 한국의 미래」, 윤이흠 외, 『민족종교의 개벽 사상과 한국의 미래』,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한승훈_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2021년 동안 발표한 연구로 『무당과 유생의 대결: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 (사우), 「선운사 석불비결사건에 대한 종교사적 검토」 (『전북학연구』 3), 「미륵, 개벽, 요나오시: 동아시아 종교사에서의 위기와 혁세 인식」 (『종교와 문화』 40), 「조선후기 변란에서의 점복」 (『역사민속학』 61) 등이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