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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 석가탄신일 부처님오신 날, 뭣이 중헌디

 


news letter No.730 2022/5/24

 



올해 ‘부처님오신 날’은 5월8일이었다. 양력 12월25일로 고정된 크리스마스와 달리,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사월초파일을 매년 양력으로 환산하여 공유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혹은 지금도 불교인들 사이에서는 그저 초파일이라고만 해도 부처님오신 날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사월초파일은 1975년에 개정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7538호]에서 처음 ‘석가탄신일’로 공식 등록되었고, 2017년 동(同)규정에서 ‘부처님오신 날’로 개정되었다. 그런 이름들이 ‘뭣이 중헌디’라고 넘길 수도 있었는데 마침 근년에 기독교계 일각에서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오신 날’로 고쳐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하므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정부가 1949년에 제정한 공휴일 8개 조항 중 하나로 ‘12월25일 기독탄생일’(基督誕生日)[대통령령 제124호]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1975년의 공휴일 규정에서 석가탄신일을 등록함과 동시에 ‘기독탄생일’이 ‘기독탄신일’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휴일에 기독교 기념일이 등록된 1949년과 불교 기념일이 공인된 1975년 사이에는 무려 26년의 시간차를 갖고 있다는 점과, 12월25일은 성탄절이나 크리스마스가 아닌 기독탄신일이 공식 명칭이라는 점이 아마도 얘기할 거리가 될 것 같다.

그런데 불교인이 부처님오신 날을 초파일이라 부르거나, 석가탄신일이라 부르거나, 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독교인이 기독탄신일을 기독탄생일이라 부르든지, 성탄절이라 부르든지, 혹은 예수님오신 날로 고쳐 부르든지,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필자의 경험으로만 보면, 불교인으로서 스스로 초파일이라 하거나 석가탄신일이라 하거나 부처님오신 날이라 하거나, 거룩함과 예경(禮敬)에서 별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래도 남들이 석가탄신일이라고 하면 품격을 낮춰 부르는 것 같아서 꼭 짚어 부처님오신 날로 바로잡고 싶어진다. 한편으로 12월25일을 성탄절이라 부르는 데에도 이의가 있다. 인류의 성인(聖人)은 예수님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어로 성탄절은 기독교가 독점하다시피 쓰기 때문이다.

불교계든 기독교계든, 해당기념일의 수사(修辭)에 신경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같은 소속의 교인들을 위함이라기보다는 기타[非/異]교도를 의식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종교가 타인들에게서도 존중되기를 바라는 그 심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념일의 명칭만 바꾼다고 해서 그전에 없던 존경심이나 거룩함이 더 느껴질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공권력이 석가탄신일을 부처님오신 날로 그 이름을 바꿔 주었지만, 여전히 도처에서 불상이 내던져지고 훼손되곤 한다. 알다시피 수많은 사찰· 교회· 성당 등의 신자들이 있지만 피차간에 진정한 존중과 권위는 그 명칭이나 외양(外樣)을 넘어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필자에게 금년 사월초파일은 습관적 신행(信行)에 대한 자기반성의 시간이었다. 도시에 있는 사찰은 물론이고 산중사찰도 요즘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도량(道場)이 되었지만 정작 불교인의 사찰 소속감이나 승가(僧伽)의식이 그만큼 깊어졌을까. 심지어 초파일에 절에는 가지 않더라도 은행계좌로 등 값을 송금하면, 여러 곳에서 축원(祝願) 등을 달 수 있는 것도 오래된 일이다. 불교경전에서 강조한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은, 물자(物資)에 압도된 오늘날 어디서 빛나고 있을까.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자동차로 성급히 가닿지 않고 찬찬한 정성으로 걸어가서 두세 곳의 절에 등을 달기로 작정했다. 어릴 적 우리 할머니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도 그렇게 걸어서 절에 가셨고, 도중에 잠시 쉴 때조차도 공양미(供養米)를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으셨던 기억이 있어서다.

초파일 당일, 집에서의 출발은 산뜻하였으나 온갖 편리함에 익숙한 50년차 도시생활자가 제 발로 한동안 걸어가다 보니 어김없이 망상(妄想)이 뒤따라왔다. “차들이 많이 오가는 길이라 공기가 나쁜데, 택시를 탈까.” 그러저러 드디어 길 건너편에 절 입구라는 표지가 보이는데, 근처에 횡단보도가 없어서 10여분을 우회하게 되자 또 망상이 속닥속닥, “주지스님의 정치력이 없으시군, 신자들 편의를 위한 횡단보도 하나를 절 가까이에 내지 못하셨어.” 평소에 잘 걷지 않던 필자의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하니, 나지막한 산인데도 길은 멀게 느껴지고 망상은 끊이지 않았다. 출발할 때의 경건함을 다 잊어먹은 듯싶은데 문득 돌아보니,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 몇 분이서 그 언덕길을 즐거운 얼굴로 가볍게 오르고 계셨다. 무릇 절에 이르는 산행(山行)이란 각자의 조건 없는 정성과 심열(心悅)을 바치는 ‘공양(供養)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서 “한마음 쉬어가는 도량”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절의 일주문이 나타났다.

부처님오신 날이든지 예수님오신 날이든지 그 수식어와 허명(虛名)에 과민하지 않으며, 경쟁적으로 더 크고 화려한 건물과 더 많은 신도 수를 자랑삼지 않으며, 종교계가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존중과 예우를 받으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그 속에서 종교인 각자는 어떻게 달리 살아야 하는가. 과연 무엇이 종교를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가. 지난 사월초파일에 모처럼 걸어서 절에 다녀오느라 두 발에 생긴 물집의 기억과 함께,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의 출발지점을 다시 짚어보았다.

 

 

 







 


이혜숙_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 전 동국대 겸임교수
논문으로 <종교사회복지의 권력화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고, 저서로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공저), 《임상사회복지이론》(공저),《종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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