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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碧巖錄)』 서평
news letter No.794 2023/9/5
1. 만약 무인도에 한 권의 책을 가져간다면?
만약 무인도에 가져갈 한 권의 책을 고른다면 『벽암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벽암록』은 그 목적상 책이 아닌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옛날 김대중 대통령의 시민들과의 대화에서 어느 한 시민이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장면을 보았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 운영과 관련된 책을 가져갈 것이라는 대답을 하여 국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여념이 없는 이미지로 호응을 얻었다. 어쩌면 『벽암록』이 책이 아닌 책이라는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오히려 올바른 선답(禪答)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벽암록』처럼 간화선(看話禪)의 동문서답(東問西答)을 실은 선(禪) 어록이 담긴 책의 종류는 많다. 화두를 1,700공안이라고도 하고, 하나의 화두를 타파하면 1,700공안을 모두 타파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벽암록』에 대해 서평을 쓴다는 것은 이 『벽암록』이라는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선종(禪宗)의 동문서답 모두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무자진경(無字眞經)
어렸을 적 기억에 소설 서유기를 본 기억이 있는데, 서유기라는 소설은 생각보다 상당히 분량이 긴 소설이었다. 지루하게 계속 요괴하고 싸우는 이야기만 나오길래 결론을 미리 봤었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삼장법사가 제자들과 천축국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런데 수레에 실어 온 불경을 마중 나온 황제가 펴 보니 불경에는 전혀 글자가 적혀있지 않았다. 이걸 무자진경(無字眞經)이라고 말했던 구절이 생각이 나는데, 이 무자진경도 어쩌면 『벽암록』과 같은 선어록들에서 말하는 선종의 가르침의 영향일 듯도 하다.
『벽암록』은 사실 진리와 깨달음이란 말과 문자, 심지어 사고조차도 넘어서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벽암록』에 담긴 100가지 선문답(禪問答)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자꾸만 언어와 사고를 통해서 깨달음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깨부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사실상 선(禪)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면 『벽암록』은 필요 없는 책이고, 무자진경(無字眞經)이면 충분하며,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저녁에 지는 저녁노을이 깨달음을 위한 진정한 경전이 될 것이다.
사실 언어와 사고를 버리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말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는다. 언어와 사고를 진정으로 버린다면, 연구자들은 집에 쌓여 있는 수천 권의 책들과 도서관의 수십만 권의 책들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고를 버린다는 것, 사고를 넘어선다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평생 맴도는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말일 것이다. 달마가 혜가(慧可)에게 왜 왔냐고 묻자 혜가가 ‘심불안(心不安)’이라며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고통과 집착을 말한 것처럼, 사고를 버린다는 말도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벽암록』의 선종(禪宗)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철학의 영역을 넘어선 종교적 신비의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언어와 사고를 버리고 넘어서라는 것은 액면 그대로 언어와 사고를 다 버려서 무화(無化)하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상식적인 삶, 즉 일상(日常)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도 성립하지 않게 된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좋은 종교의 가르침도 결국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삶이 시금석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사고를 버리라는 것은 전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무화(無化)시키는 삶이 아니라, 언어와 사고에 구애되지 않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상의 상식에 부합하지 않은가 한다.
3. 자기지시(自己指示)적 역설
하지만 여기에는 또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언어와 사고에 구애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언어와 사고에 구애되고, 집착하고, 자유롭지 못해지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자면 자기지시(自己指示)적인 역설이라고 하는데,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무아(無我)를 말하며 나를 내려놓으라고 말하는데, 나를 내려놓겠다는 생각이, 나를 버리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큰 집착이 되는 상황이다. 무아(無我)를 통해 아(我)를 버리려고 하다 보니, 무아(無我)가 오히려 또 다른 아(我)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어쩌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벽암록』을 비롯한 1,700공안(公案)이 탄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벽암록』의 화두에는 대대(待對)적인 변증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문서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벽암록』에 대한 여러 그럴듯한 철학적 변증의 시도들이 사실상 『벽암록』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경지에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서 인생이던, 예술이던, 역사이던, 운명이던, 특별한 순간의 번뜩임은 결코 말과 생각의 추론적 논증 혹은 변증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우연과 신비가 아니었던가.
4. 『벽암록』 한 구절
그래도 서평인지라 벽암록 속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이라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벽암록』 제19칙에는 ‘구지의 한 손가락[俱胝一指]’이라는 화두(話頭)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칙(本則)」: 구지(俱胝) 스님은 묻기만 하면 오로지 하나의 손가락만을 세웠다.
「평창(評唱)」: 구지 스님의 암자에 한 동자가 있었는데 바깥에서 어느 사람에게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지도하시느냐?”라는 질문을 받자, 손가락을 일으켜 세웠다. 동자가 되돌아와 자기가 한 행동을 스님께 말씀드렸다. 구지 스님은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니,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 스님이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이에 구지 스님이 문득 손가락을 곧추세우니 동자는 훤히 깨치게 되었다. 말해보라. 동자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를.
과연 『벽암록』의 이 구절을 읽고 ‘도리’가 보이는가? 분명한 것은 구지 스님의 한 손가락과 동자의 한 손가락은 천지 차이의 다른 손가락이라는 점이다. 또한 처음의 구지 스님의 한 손가락과 동자에게 보여준 한 손가락도 분명히 다른 손가락일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 세 가지 손가락이 모두가 궁극에서는 다 똑같은 손가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벽암록』이 전하는 메시지인 선종의 메시지에 따른다면 이 한 손가락은 팔만대장경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불교의 궁극을 담고 있는 선문답이다. 이러한 동문서답이라는 간화선의 대화는 적어도 다른 여느 철학과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선불교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독특성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한 바가지 물을 퍼담는 데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한 손가락에 대해 강신주 선생님은 들뢰즈를 염두에 둔 듯 ‘차이의 반복’이라는 절묘한 해석을 내린 바가 있다. 하지만 또 이 손가락은 ‘차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시에 ‘동일한 것의 차이’ 혹은 ‘동일한 것의 반복’일 수도 있을 듯하다. 불교의 공(空)의 논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정말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진공묘유(眞空妙有)로서 중도(中道)는 언어적 진술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5. 어렵고도 쉬운 진리와 인생
비록 『벽암록』과 같은 동문서답의 언어적 맥락은 학술적 차원과 일상적 대화의 차원 모두에서 단절되어 있으나, 그래도 천 년을 넘게 지속되어 온 역사 속에서, 우리 이성의 한계 속에서 한번 믿어 보고 싶은 희망과도 같다. 왜냐하면 세계의 거대함과 인생의 심연 속에서 우리가 갈 길은 너무나도 까마득하기 때문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진리와 깨달음이라는 것이 고작 한두 구절을 이해하는 것 혹은 몇백 몇천 권의 책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시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돌연 듯 다가오는 내 마음 깊은 곳의 불안과, 언제는 자신만만하던 자부심이 순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인생의 굴곡 속에서 『벽암록』은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려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의 파고는 높고도 높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보지 못하는 등잔 밑에서 파랑새가 노래하고 있는 쉬운 길도 있음도 또한 알려주는 것 같다.
이찬희_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문화연구소
논문으로 <대종교(大倧敎)에서 말하는 마음의 세 가지 성격: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평균적인 성격 해석>, <대종교(大倧敎)의 불도유(佛道儒) 삼교회통관(三敎會通觀) 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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