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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91호-믿음의 플라세보 효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8. 15. 16:41

믿음의 플라세보 효과

 

 news letter No.791 2023/8/15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 말 어느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방언을 할 수 있었다. 이상한 말이었고 내 스스로 이해할 수도 없는 언어였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따라 방언이 나름의 패턴을 보인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날의 기도는 나에게 찾아온 심한 감기몸살을 물리치기 위한 일종의 치병기도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약국에서 약을 사먹거나 병원에 갔을텐데, 그때가 마침 부흥회 기간이었는지, 이번 만큼은 왠지 기도로 병마를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찬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열어둔 것도 기왕 기도로 물리치는 마당에 다 덤벼!’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십여 분, 아니 삼십 분가량을 열심히 기도한 후 나는 몸상태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날 저녁만큼은 편히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상태는 악화되었고, 그날 저녁 다시 한번 창문을 열어두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차도가 없어 결국 약을 먹어야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부족한 믿음만을 증명한 사건이 되고 말았지만, 첫날 저녁 그나마 좀 나아진 기분으로 편안하게 잤던 기억은 생생하다.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s), 즉 위약효과는 약리학적으로 활성 성분이 없는 가짜 약물을 투여하거나 효과가 없는 무해한 의료적인 시술을 처치하였을 때,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1) 의학계에서 위약효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새로운 치료법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을 통해 새로운 치료법이 위약 처치군보다 효능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다.2) 그런데 오늘날 위약효과에 대한 관심은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치료행위의 의미가 단순히 약물의 효능만을 뜻하는 것을 넘어 복잡다단한 여러 심리사회적인 자극들이 동반되는 과정으로 이해되면서, 이러한 심리사회적 요인과 위약효과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 위약이 환자의 불안감을 감소시키고, 치료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보상 기제로 작동하면서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효능을 갖는다는 것이다.3)

 

나는 이제 더 이상 고1 때의 신앙인이 아니다. 여전히 방언이 아주 가끔 재연되기는 하지만 고교시절만큼 신비스럽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이렇게 된 것이 개신교인들이 흔히 말하듯이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로 신앙적으로 성숙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여하튼 종교에 대한 나의 관점은 종교학을 하면서 상당히 달라졌다. 그래서 고1 겨울밤 내가 겪었던 첫날 밤의 평안함도 플라세보 효과의 일종이었다고 주저없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소위 영빨이 충만했었고, 게다가 부흥회 기간에 방언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병마를 물리치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지닌 상태였기에, 그 믿음이 일종의 위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당연히 지금은 고교시절처럼 방언기도로 감기몸살을 물리치려 하지 않겠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면 과연 그 방언기도는 위약효과를 발휘할까? 이미 나는 그것이 위약효과라고 인지하고 있는데, 과연 그 위약이 효능을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위약효과 연구의 선도자인 파브리지오 베네데티(생리학 및 신경과학 교수)가 말하길, “절차로서의 치료행위는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환자의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 위약치료에 반응을 보이기 위해 치료를 믿거나 의사를 신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4) 나에게는 생소한 전문 내용이어서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위약효과에 대해 긍정적인 자의식을 갖지 않아도 특정한 행동을 통해 위약효과의 조건이 생성가능하다는 것이다. 면역반응과 호르몬반응이 무의식적 위약반응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정신생물학적 현상, 즉 인간의 뇌 안에서 어떤 활발한 무언가가 생기는 위약효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도의 효험을 믿지 않아도 기도의 행위를 행하면 그것이 위약효과를 발휘하여 심신의 평안함을 가져다 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 종교학의 학문적 위상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모든 학문의 가치판단을 효용성으로 측정하는 세상에서 과연 종교학의 효능은 무엇일까 고민이 된다. 나는 종교학은 인간학이라 생각한다.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 존재의 유무는 괄호치고 본다면, 종교라는 그 무엇은 일종의 제도로서 혹은 세계관으로서 인간이 형성해 온 그 무엇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종교학은 종교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게 내 나름의 종교학에 대한 정의이다. 그리고 실상 이것은 포이어바흐가 했던 말,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내용과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이며 신적인 본질의 비밀은 인간적 본질의 비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와 별반 다르지 않다.5) 그런데 종교학이 종교를 이렇게 분석하고 나면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종교의 본질이 결국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종교는 인간의 투사이고 허상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알고도 종교를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종교학으로 밥벌이 하는 입장에서 이런 질문은 현실적이다.

 

찬찬히 깊게 따져 물어야 할 질문이고 과제이지만, 위약효과에 대한 논의들이 얼마간 돌파구를 제시해 주는 느낌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종교가 아편이어도 그것은 실제적인 효능을 갖는다. 종교가 허상이라고 과학적으로분석해도 종교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희망이자 생존도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위약일지라도 효능을 발휘한다. 게다가 그것이 위약이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몸짓과 행동을 통해 위약반응의 조건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명제 자체가 연구할 과제이겠으나 아무튼 여전히 종교학이 할 역할이 있지 않겠나 하는 위안을 삼아본다. 종교를 통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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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영채, “의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위약효과”, 《의철학연구》, 제26권, 2018, 26쪽.

2) 임영채, 위의 글, 28-30쪽.

3) 파브리치오 베네데티, 《환자의 마음》, 이은 옮김, 청년의사, 2013, 244-300쪽.

4) 파브리치오 베네데티, 위의 책, 266쪽.

5)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강대석 옮김, 한길사, 2008, 421쪽.

 

 

 

 

 

 

 

 

김재명_
건양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최근 논문으로 〈보건의료에서의 종교와 세속〉, 저서로 《죽음학교실》(공저)이 있으며, “보건의료에서의 종교와 영성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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