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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의 효용을 생각하며
news letter No.797 2023/9/26
종교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그 성격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듣는 이야기가 여러 다양한 종교를 비교의 관점에서 객관적이며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정도가 아닐까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특징들이 유독 종교학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비교 방법, 객관성, 과학성은 근대학문이 발원하고 발전하는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비교 방법만 하더라도 근대 이후 지리적인 확장과 함께 지구상에는 수많은 부류의 사람과 문화가 존재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졌고 학문적으로도 어떻게 하면 이 다양성을 파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중립성이니 객관성이니 하는 가치도 연구자의 편견이 연구 대상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관심에서 싹튼 것이라서 꼭 종교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한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인간은 본래 편견으로 살아가는 존재라서 이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편견에서 시작해서 편견을 지워나가는 과정이야말로 학문의 본령이기도 하다. 이때 객관성이라는 요소가 학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조정하는 작업이 동반된다. 즉 객관성은 처음부터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산물이거나 학문의 목표가 된다. 여기서 편견을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요청된다. 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이런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인간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도 종교학이 아니더라도 인문학 전반에 걸쳐서 늘 강조되었던 사안이다. 다만 과학적인 태도만을 강조할 때 인간 혹은 인간성이 실종되는 위기가 초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양한 물음과 방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인문학의 역사란 그러한 고민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에서 과학성이란 적어도 도외시되거나 외면될 필요가 없는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종교학에서 과학성은 연구자가 의도적이건 혹은 그렇지 않건 종교적인 발언으로 빠지는 위험을 차단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연구자마다 다르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면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 자주 지적된다. 반증 가능성이란 하나의 가설에 대하여 실험과 관찰 혹은 경험적인 자료를 통해서 반증할 수 있어야 과학성을 지닌다는 견해이다. 누군가가 연구 결과를 제출했을 때 다른 사람이 경험적인 자료를 통해서 검증할 수 있어야만 그 성과에 과학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학을 하다 보면 자기가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종교적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경우를 본다. 종교적인 담론이란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지닌 것이어서 애당초 반증 가능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영역이다. 과학성에 대한 강조가 반드시 지식의 진보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 과학성은 그저 종교학의 성과가 종교적인 담론 안으로 희석되는 것을 방지하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
종교학의 속성이 다른 분야와 그다지 다를 바 없고, 종교학의 지식이 종교적인 담론과 다르므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 안에서 논의되는 주제이고, 따지고 보면 새삼스럽지도 않고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종교학의 학문적 성과가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로 수용되고 유통되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가령 이단이니 사이비종교니 하는 용어의 사용이 그 자체로 종교들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통되는 현상을 보면 종교학의 발언이 진지하게 수용되지 않는 현실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근래 한국 정치는 종교학자가 보기에 매우 흥미로운 현상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정치의 현장이 종교현상의 출처가 되고 그에 따라서 발생한 정치적 논란에 이런저런 종교 담론이 활용되는 모습이 여간 어색하지 않고 심지어 불편한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종교학자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데는 충분한 요소를 갖추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조찬 기도회처럼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 종교가 등장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처럼 주술이나 무속, 점복, 풍수와 같은 다양한 종교현상이 정치 영역에 등장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만하다. 물론 전자가 등장한 방식이 공개적이었다면 후자는 은밀했던 차이는 있다.
그 뒤를 이어 어김없이 시작된 정치적 논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소통되는 종교에 대한 관점과 인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 논쟁에 동원된 종교 담론을 대충 뜯어보면 정파를 초월하여 ‘종교’와 ‘종교 아닌 것’ 혹은 ‘미신’을 구분하려는 의욕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이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범주에는 기독교나 불교가 포함되리라 짐작하는데, 앞서 말한 주술, 무속, 점복, 풍수는 ‘종교 아닌 것’으로 분류된다. 후자는 심지어 ‘미신’이기도 하므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미신’을 정치의 장에 노출했다고 공격하는 정파에 맞서 상대방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전략을 취한다. 가령 풍수나 점복을 ‘전통문화’이거나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문’이고, 여기에 관여했던 한 인물에 대해서도 술사나 쟁이가 아니라 어엿한 ‘교수’라고 방어하는 태도는 ‘미신’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어떤 관점을 취하든 ‘종교’와 ‘종교 아닌 것’의 구분을 따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 논쟁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장면은 무속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매우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무속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실체가 실제 무엇인지 상관없이 마치 모든 미신을 대표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무속은 그동안 한국문화의 원형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학계에서도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어들인 바 있다. 이러한 성과가 무색하게 무속이 미신의 범주로 묶여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배경이 정치적인 요인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적인 배경을 떠나서 무속을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다고 보는 태도는 분명한 듯하다.
사람들이 평소 종교에 대해 품고 있던 인식이 이번 정치적인 사건처럼 특정 계기를 빌어 집단적으로 불쑥 불거지는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수도 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는 수평적인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한국의 종교학이 사이비종교나 이단, 미신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짚어내는 작업을 넘어서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종교 관련 사건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좀 더 정밀하고 유효한 분석 도구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낀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최근의 논문으로 〈서주시기 위계와 권력에 관한 소고: 도시의 종교적 성격을 중심으로〉, 〈서주 금문에 나타난 長壽와 宗法의 관계에 관한 소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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