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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의 시에서 추스르는 마음
news letter No.798 2023/10/3
앤 카슨의 시를 읽다가 오래전, 그러니까 4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날,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전파상 텔레비전의 뉴스 방송을 통해서 슬쩍 알게 되었던 그 날. 그렇게 죽음의 광폭함을 내게 알리는 신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동안 말문을 닫고 마음의 굴을 파고들며 쉬지 않고 신에게 물음을 던졌던 그때가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출신)를 대면하기 위해 이동하는 축제 기간 한가운데서 앤 카슨은 내게 이렇게 읊조린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삭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이삭은 눈먼 자라고도 불렀다.
마음의 어두운 하늘 속에서
이삭은 가장자리에 나무가 심어진 시골길을 이동해가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이름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부사다.
베토벤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길 바랐던 사람들을 위해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작고 검은 공책처럼,
신이라는 부사는
당신이 있는 모든 곳으로 가는 일방통행로이다.
당신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봐야 헛일이다.
그냥 그걸 곱씹어서 문질러 발라라. [앤 카슨, ‘신의 이름’ 중에서]
상실과 아픔에 앞서 나를 사로잡았던 혼란스러움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포획 틀에 신을 가두고 의미의 보상을, 다시금 깔끔하게 정돈된 세계를 돌려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죽음 앞에서 무력한 신의 존재를 나의 삶에서 떼어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카슨의 시처럼 인간과 신이 각기 명사적 존재와 부사적 존재의 양태를 취한다면, 둘의 관계 방식과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어린 나이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카슨의 시에서 신은 “내가 있는 모든 곳”에 찾아와 나와 주위를 촘촘히 감싸면서 쉼 없이 활동하는 ‘능산적 자연’, 존재의 매트릭스로서 내게는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과서와 철학적 참고서를 통해 익숙했던 신을 가리키는 개념과 관념의 불투명한 막을 제치면서 카슨은 단순하고 투명하게 신을 소개한다.
개념의 틀로써 신을 정제해서 알려고 하지 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카슨은 신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누구에게나 그런 능력은 있지만 ‘실존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나 할까. 이삭의 또 다른 이름인 ‘눈먼 자’는 어떤 존재의 상태에 있어야 신(이 깃든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무엇을 볼 수 없고, 그래서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지를 이삭이라는 인물을 통해 카슨은 담담하게 전해준다.
[....]
나무가 신에게 반사된 방식을 통해
이삭은 어느 것이 똑바로 길게 뻗은 나무인지,
혹은 언제 그것들이 몸이 머리를 짊어지듯
가지를 짊어지게 되었는지,
혹은 왜 어떤 나무들은 덤불 속에서 땅을 향해 낮게 웅크리는지를 알았다.
신이 우주 사이로 이동해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늘날 우리는 어떤 것을 보게 되었고 그 대신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카슨은 ‘눈먼 자’ 이삭이 알고 있는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삶을 곱씹고 반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정답을 확인하는 일이 아닌, 직접 사물들의 움직임과 소리와 색채를 타고 흐르는 정동의 파고에 젖어 들면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꼭 봐야만 하는 것을 뒤덮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수전 손택은 비인간적인 속도로 변해가는 역사 앞에서 현대 유럽의 지성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는 느낌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구토감’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타자 안에서 자기를 구하려 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구원의 방식이 “이국적인 것, 낯선 것, 타자에 항복하려는 욕구와 주로 과학을 통해서 이국적인 것을 길들이려는 욕구” 사이에서 배회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손택은 그 역설에 기댄 학문으로서 인류학을 제시하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레비-스트로스를 꼽는다. 그녀의 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건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논리적 엄밀성에 근거해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과학기술로 진보된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상실하고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손택은 정신적·물리적 에너지가 과잉 집중되는 ‘뜨거운 사회’의 확장에 비례해서 점차 사멸하는 ‘차가운 사회’의 애도자이자 문지기로서 고군분투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발견했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수전 손택, 「영웅으로서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차가운 세계’를 유토피아로서 제시하고 있다면, 카슨은 ‘뜨거운 세계’에 몰입하면서 ‘차가운 세계’를 상실해가는 문명인의 정신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짐작으로는, 카슨은 원시와 문명, 과학과 주술, 이성과 감정, 미완과 완전, 쓸모와 쓸모없음 등의 계열로 세상과 사물을 구획하고 거기에 존재론적 격차와 우열을 평가하는 시점에서 눈을 돌릴 때 비로소 활짝 제 모습을 열어젖히는 우주의 상(相)을 시의 언어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손택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상실의 파편을 사방에 날리면서 직진만 하는 현대 문명을 멈춰 세워야 한다는 예언자적 행위의 급진성이 아니다. 손택은 그저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상실감과 고독감, 그에 따른 혼란스러움을 처리하는 서구 지성인의 방식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음을 전한다. 카슨은 손택이 말을 멈춘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곧 ‘차가운 사회’ 또는 잃었다고 생각되는 세계는 그것을 회복과 재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낭만적인 시선에 갇힐 때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현대문명의 비정상적인 속도를 멈추는 순간, 또는 최소한 그런 문명의 세계에서 잠시라도 자신을 떼어놓는 순간, 그 세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 우리의 고독감과 상실감을 채워주는 실제적 힘으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먼저 주머니를 가볍게 하고 보폭을 짧게 하여 소리와 색, 흔들림과 멈춤의 세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봐야 할 것과 보지 않아도 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날 마음의 공간이 열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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