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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99호-아카이브의 향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10. 10. 15:50

아카이브의 향기

 

news letter No.799 2023/10/10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작업자 본인이 본인의 아카이브 작업을 물에 뛰어드는 것, 물속에 잠기는 것, 심지어 물에 빠져 죽는 것에 빗대는 경우도 많다.”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몇 해 전 신간 안내에 나온 책 제목을 보고 도서관에 신청하여 빌렸다. 문고판 크기에 150쪽 남짓한 분량인데다가 내용도 재미있어서 금방 다 읽었다. 글쓴이의 개인적인 경험이 잘 녹아 있어서 내 가슴에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나도 내 경험과 기억을 저렇게 풀어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대신에 내 기억의 서랍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열렸다.

 

주전자 물이 막 끓기 시작하면 게거품처럼 작은 공기 방울이 쪼르르 수면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불을 끄고 물을 숙우에 따라 잠시 식힌다. 따뜻하게 데운 다관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부으면 마른 찻잎들이 움직이며 싱싱했던 곡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찻잎의 펼쳐짐과 비슷하다. 차 향기와 더불어 이십여 년 전 파리 6구의 고색창연한 건물 한편에 붙어 있는 작은 골방에서 맡았던,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냄새가 코끝에 아른거린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서 올라오는 먼지 냄새, 한국에서 맡아 보지 못했던 청소용 세제 냄새, 내 앞에 펼쳐진 150년 된 편지에서 풍기는 오래된 종이 냄새. 그렇다, 내 기억에 자리 잡은 아카이브의 향기는 그런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은 1년 동안 아카이브 작업을 하고 돌아온 뒤였다. 그전까지는 남들이 쓴 책이나 논문에 들어 있는 내용을 세로로 혹은 가로로 다시 엮고는 여기에 간단히 내 생각을 붙이면 논문이 된다고 여겼다. 자료의 숲 혹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죽을힘을 다해 읽어내고, 한 오라기 실에 불과한 구절을 내 손으로 건져 올려 해석하고 분석하며, 이렇게 차츰차츰 쌓인 자료 카드들로 정밀하게 논지를 구성해 나가야 비로소 남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글 한 편을 간신히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카이브를 다녀온 뒤라고 해서 천지가 개벽한 것은 아니다. 그냥저냥 창피한 줄 모르고 허점투성이로 쓴 글들이 더 많다.

 

그래도 아카이브에 드나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만 꼽는다면 자료는 꼭 실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정서한 것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가령 내가 주로 다루는 자료인 선교사 편지를 보면, 어떤 대목에서 머뭇거릴 때가 있고, 또 반대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갈 때가 있다. 그 글씨에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분노나 절박함이 어린다. 또는 삐뚤빼뚤 쓴 글씨에는 건강 이상의 흔적이 담겨 있기도 하다. 간혹 여백에 세로로 쓴 글씨에는 신중함이나 암묵적인 정보 전달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길고 긴 줄임표에서 함축된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일도 있다. 요즘에는 마이크로필름이나 스캔본을 실물 대신 보여주는 아카이브도 많다. 그래도 기를 쓰고 실물을 보여달라고 해야 한다. 확대할 수 있어서 판독하기에는 더 쉬울지 몰라도 원본이 가지고 있는 날것의 느낌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깨달음을 다른 연구자에게 전하고 싶다. 전달 방법은 아카이브 작업을 준비하는 연구자에게 공구의 역할을 해 줄 책을 만드는 것이다. 아카이브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해당 문서철은 언제 누가 무슨 기준으로 묶었는지, 문서들의 분류와 정리 체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아카이브 담당자에게 무엇을 보여달라고 해야 내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게 찾아주는지를 알려주는 책을 구상하고 있다. 여기에 수신자와 발신자가 누구이며, 원본인지 아니면 복본이나 사본인지,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등을 담은 낱장 문서들의 전체 목록을 만들어 부록으로 실을 생각이다. 이것이 나에게 자료의 바다를 열어서 보여준 아카이브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몇 주 뒤에 다시 아카이브 여행을 떠난다. 2주간의 짧은 방문이다. 옛날처럼 1년씩 머무는 장기간의 조사는 아니다. 그래도 연필과 종이만 들고 들어가서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문서들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들여다보고 필요한 부분을 베껴 쓰는 작업을 하루 종일 하고 나올 것이다. 아카이브 담당자가 문서철을 가져다주면 먼저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이고 코를 가까이한 다음에 냄새부터 맡아야지. 그러면 그 옛날처럼 아카이브의 향기와 분위기가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마치 옛 연인과의 재회를 앞둔 설렘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흔든다. 가을 탓인가?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 쓴 글로는 <김지하와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 <19세기 한국 천주교 문헌 주년첨례광익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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