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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에서 다산학으로: 근대 한국의 천학(天學)
news letter No.817 2024/2/13
중국철학사에서 주자학은 리학(理學)으로, 양명학은 심학(心學)으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주자학도 심학으로, 양명학도 리학으로 명명될 수 있다. 주자학은 불교의 심학에 대항해서 건립한 성리학적 심학 체계로 볼 수 있고, 양명학도 리기론이라는 주자학의 우주론을 거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다산 정약용은, 비록 심학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주자학을 ‘심학’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인(仁)이라는 것은 ‘두 사람[二人]’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자장이 인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함께하는 법이다. 안으로는 제가치국(齊家治國)이고 밖으로는 평천하(平天下)와 협만방(協萬邦)이다.” 선대의 유학자들은(=주자학자들은) 단지 심학의 관점에서만 인을 풀이했는데,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논어고금주》제9권 〈양화(하)〉)
여기에서 정약용은 유학의 핵심 개념인 인을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법’이라고 다시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타인들과 어우러지는 과정 속에서 사람다움이 학습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인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주자학에서는 ‘마음 안에 선천적으로 구비된 사랑의 리(理)’ 또는 ‘욕망을 제거하여 사랑의 리가 발현된 상태’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즉 리학이라는 틀로 인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의 발현을 가로막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주자학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중시된다. 구체적으로는 욕망을 비워낸 허심(虛心)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정약용은 이러한 입장을 지나치게 심학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학에서는 주자학의 심학적 입장과 리학적 이해를 모두 비판한다. “만물을 생성하는 리와 천지의 공평한 마음을 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약용의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여유당전서》 〈자찬묘지명〉). 정약용의 주자학 비판은 단지 인 개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유학 수양론의 핵심 개념인 성경(誠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治心) 공부를 의도를 참되게 하는 성의(誠意)라고 착각한다. (…) 이것은 평생 정좌하면서 고요히 내면을 관조해야 비로소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니, 좌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을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옛사람이 말한 ‘마음을 바르게 하기’는 사물에 대한 응대와 외물과의 접촉에 의한 것이었지, 정적을 위주로 하는 침묵의 응시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 외물과 접촉한 연후에 경(敬) 개념이 성립하고, 사태에 응대한 다음에 의(義) 개념이 있는 것이지, 외물과 접촉하지도 않고 사태에 응대하지도 않으면 경의(敬義)라고 할만한 근거가 없다. (《대학공의(1)》〈재명명덕(在明明德)〉)
정약용이 보기에 주자학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러나 마음은 외물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혼자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이다. 성(참됨)이나 경(경건) 같은 윤리적 덕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이 절로 생기고, 사람들과 협업을 해봐야 성실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관점은 앞에서 살펴본 인의 정의와도 상통한다. 이처럼 정약용의 수양론은 항상 ‘대상[事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특징은 그 대상의 최상위에 ‘하늘’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것을 인(仁)으로 삼는다”고 할 때의 그것은 성(誠)과 경(敬)을 말한다. 하지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하고 삼가면서 상제(上帝)를 섬겨야 인이라고 할 수 있지, 헛되이 태극을 존중하면서 리를 천(天)으로 간주하면 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인은) 하늘을 섬기는 사천(事天)으로 귀결될 뿐이다. (《문집》16권 〈자찬묘지명〉)
여기에서는 성경을 인의 태도라고 말하면서, 그 인을 다시 하늘을 섬기는 사천(事天)의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고대 유학의 천을 리로 해석하고, 그 리를 가지고 인을 해석한 주자학을 비판하고 있다. 즉 리에 가려진 천을 다시 되살리면서, 그 천으로 인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의 위상이 주자학과는 역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장태가 정약용의 철학을 ‘사천학(事天學)’이라고 명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약용의 이러한 입장이 압축된 표현이 ‘실심사천(實心事天)’이다. 여기에서 실심은 주자학적인 허심(虛心)과 대비되는 말로, 성과 경으로 꽉찬 마음 상태를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실심(實心)으로 하늘을 섬기었고 실심으로 신을 섬기었다. (《중용강의보》〈귀신지위덕〉)
문왕의 성과 경은 하늘을 섬기는 성과 경이었다. 성경의 근본은 하늘을 섬기는 데 있다. (《시경강의》〈대아‧문왕지십〉)
이에 의하면 원래 성경은 하늘을 섬기는 사천의 태도였고, 그것을 인간 사회에 확대 적용한 것이 정약용의 인의 정의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있어 인은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종천의 해석이 도움이 된다.
제사의 기원은 제천이 되고 (…) 결국 모든 제사가 사천으로 수렴된다. 이런 논리가 사인(事人)과 사천의 관계에 적용되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례적으로 다루는 제사뿐만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를 다루는 인륜의 실천까지도 모두 사천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박종천, 〈다산의 제사관〉, 《다산학》9, 2006, 110쪽.)
이에 의하면 정약용의 성, 경, 인의 해석은 모두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천의 태도를 인간 사회에 적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사천의 태도로 사인을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약용 사후에 탄생한 동학과의 사상적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이미 정약용에게서 단초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자신이 하늘님으로부터 받은 도(道)를 ‘천도(天道)’라고 명명하였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철학은 ‘천학(天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천학적 경향이 정약용에서는 서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드러났고, 최제우에서는 동학으로 꽃을 피웠다면,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성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성환_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저서로 《한국 근대의 탄생》,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한국의 철학자들》, 《K-사상사》,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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