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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위춘(與物爲春)의 자리매김
news letter No.819 2024/2/27
봄이 왔다.
새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시냇물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흐른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친다.
한동안 그러다가 어느덧 구름이 걷히고
다시 아늑한 봄 분위기 속에 노래가 시작된다.
초록의 목장에서 목동들이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졸고 있다.
한가하고 나른한 봄날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 나타나 목동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해맑은 봄 하늘 아래에서 즐겁게 춤을 춘다.
이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제(司祭)이자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Le quattro stagioni)〉 중 봄날의 풍광을 노래한 짧은 ‘소네트(sonnet)’이다. 그리고 비발디는 그가 직접 쓴 소네트와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봄’을 오선지에 음표로 옮겼다.
1악장은 바이올린의 ‘트릴(trill)’로 새들이 노래하는 모습과 16분음표의 빠른 음형으로 시냇물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그리고, 일제히 ‘트레몰로(tremolo)’로 연주하는 모든 현악기로 천둥과 번개가 치는 모습을 묘사한다.
2악장은 느린 악장으로 바이올린의 독주로 한가롭게 쉬고 있는 목동들의 노랫소리와 여린 현악합주로 바람에 스쳐 흔들리는 나뭇잎을 그리고, 두 개의 음을 일정 간격으로 계속 반복하는 비올라로 가끔 머나먼 허공을 향해 짖는 강아지 소리를 그려낸다.
3악장은 다시 경쾌한 ‘멜로디(melody)’로 돌아가 백파이프 반주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는 농부와 목동들의 축제, 바이올린의 독주로 흥겨운 춤 장면을 연상시키는 전원무곡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사계〉 중 ‘봄’을 듣다 보면 일말의 그늘도 없이 충만한 봄기운 앞에서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봄이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봄이 되면 모든 것이 변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러나 환경과학자들은 오늘날 기후 위기의 가속화로 지구 생태계에서 꽃이 피지 않는 봄을 맞이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며, 2019년 11월, 153개국 1만 1,258명의 과학자가 “지구는 기후비상사태”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가 기후 위기로 인한 대재앙을 줄이기 위해 “앞으로 10년이 마지막 기회”라고 역설하며 인류의 생존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이처럼 기후 대책을 요구하는 이유는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5도 내려가면 빙하기가 오고, 6도 상승하면 생명체의 90%가 멸종하기 때문이다. 201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2052년, 향후 40년의 글로벌 전망〉에는 “2030년부터 온실가스 배출을 적극적으로 줄여도 기온은 계속 상승하고, 따라서 늦어도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순 제로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공황 정도의 경제적 충격을 각오해야만 한다.”고 한다. 특히 에너지 과소비 국가인 한국은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OECD 국가 평균 대비 40%나 많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L. Huxley, 1894-1963)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1932)에서 사람들 스스로 듣는 것을 분석할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전자 매체로부터 나온 정보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회,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로지 쾌락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를 그려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예견은 현재 대부분 그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세상은 그 변화의 속도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그 변화의 방향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 채 결국에는 영혼의 상실, 즉 심원한 실체의 신비를 경험하면서 생겨나는 경이로움, 웅장함, 시, 음악, 영적 찬미를 상실한 채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계속 일삼으며 다음 세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는 이처럼 인류가 삶의 터전인 자연을 파괴하여 생존의 위기에까지 몰린 근본적 원인을 현대 인류 문명이 지구의 장엄함과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지구나 다른 생명체들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의무보다는 인간의 권리를 앞세우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우주 만물의 신비에 대한 경외심에 기초하여 모든 지질학적, 생물학적, 인간적 구성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지구 공동체의 평화(Pax Gaia)’를 지향하는 ‘생태대(Ecozonic)’로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산업사회와 편협한 세계관이 강요한 좁은 감수성의 틀에서 벗어나 우주와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 자연세계의 거룩함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다시 살려낼 것을 강조한다.1) 그리고 이는 ‘여물위춘(與物爲春)’이라는 전통 종교적 지혜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니 봄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봄이 되면 거친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는 대지의 힘찬 기운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이제 타자와 함께 꽃이 피어나는 봄을 위해 우리를 대지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와 상호의존성의 연결망 안에 뿌리내리는 자리매김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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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 에벌린 터커 · 존 그림 · 앤드루 언절 지음, 이재돈 · 이순 역, 《생태사상의 선구자, 토마스 베리 평전》, 파스카, 2023.
임복희_
前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객원교수
최근 논문으로 〈한국 법원의 종교 성지 공간에 대한 이해: 성지 공간을 둘러싼 종교 간 갈등에 관한 두 판례들을 중심으로〉(2023) 등이 있다. 법학자로서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연구 및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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