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577호-종교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6. 4. 19:11

종교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news  letter No.577 2019/6/4   

 

 



요즘 저는 종교를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좋은 가치와 착한 규범들을 가르치고 실천한다는 종교들이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살육도 마다하지 않는 싸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바야흐로 우리 울안에서도 그런 사태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일면서 무척 당혹스럽고,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하기야 종교 간의 갈등이 어제 오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종교는 아득한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무릇 신념이란 그것이 굳어지면 거의 맹목적인 자기 절대화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에게는 무척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종교는 평화를 위해 기여하기보다 실은 갈등을 야기하는 주체로 지속해왔다고 해도 그르지 않을 만큼 늘 스스로 가르치는 좋은 덕목이 무색할 미움, 저주, 살육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종교 간에, 종교와 종교 아닌 다른 문화 간에, 그리고 심지어 자기네 집안에서조차 한 번도 조화롭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제각기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종교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거룩한 논리’를 당당하게 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사는, 이를테면 정치사와 다르지 않게, 그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종교적이기를 지속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종교의 소멸, 그것을 수반한 신의 사망, 그리고 새 종교의 출현, 그것을 수반한 신의 탄생으로 점철되는 역사를 종교사는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 종교들이 서로 각을 짓고 으르렁거리는 현상을 보며 종교란 본래 그러한 것이라고 하면서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의 일이 종교의 울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삶의 한 자락인데 그것이 제대로 제 몫을 하지 못하면 사람살이 전체가 성하질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만이 참과 옳음과 착함을 전유(專有)하고 있다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이른바 종교의 ‘타자배제의 윤리’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자기를 승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라고 가르치는 한, 그러한 태도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 굉음(轟音)을 내지 않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 대한 인식 이전에 그 다름을 그름으로 판단하는 태도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새삼 겪고 있는 ‘테러’는 ‘전투’의 변용(變容)이라기보다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제의(祭儀)’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동조하지 않는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상관없이 배제해야 한다는 ‘신념이 집전(執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테러의 희생자는 그 테러주체에게는 신에게 봉헌한 제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지닌 문화가 성하게 되면 인간의 어떤 가치도 의미도 공황상태에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이 지경에 이르면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장한다면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우리가 직면하는 종교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러해야 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 해답이라고 이해해온 종교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기에서 저는 북유럽의 신화(Nordic myth)를 조금 살펴보고 싶습니다. 아득한 때의 게르만족의 이야기들을 13세기에 다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엘더 에다(Elder Edda. 에다의 시)』는 다른 문화권과 상당히 다른 그들 나름의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최종의 파멸(Ragnarök)을 향해 운명 지워있다는 것, 그 파멸은 집안의 갈등과 형제간의 살해와 근친상간의 만연이라는 안의 전조(前兆)와 죽은 자의 영역에 있는 개(Garm)들이 짖어대고, 늑대(Fenri)들이 먹이를 찾아 배회하고, 사람을 해치는 바다의 뱀이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밖의 전조들을 보여준다는 것, 그러다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떠받치면서 가지를 뻗어 온 세상을 덮은 거대한 나무(Yggdrasil), 곧 우주 축(axis mundi)이 흔들리면서 하늘과 땅을 잇는 무지개다리(Bifröst)마저 끊어진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바다건너에 있는 거인(Surt)들과 우리를 지켜주는 신들이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 그런데 신들(Odin, Thor, Ty)이 모두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는 것, 마침내 땅을 태우는 불꽃이 하늘에 이르고, 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땅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세상이 끝난다는 것.

흔히 선(善)의 궁극적 승리가 노래되는 것이 신화입니다. 그런데 이 북유럽의 신화는 다릅니다. 신은 예시한 전조들이 고쳐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자신들마저 소멸되고 맙니다. 인간의 현실을 신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것이 신의 운명입니다. 세상은 당대의 신과 인간, 그리고 그에 적대적이던 부정적인 힘들을 모두 아우른 채 사라집니다. 진정한 종국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는 이 파멸의 이야기는 아무런 논리적 연계도 없이 새 세상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오딘(Odin)의 몰락 후에 오시는

내가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

새 세상이 열린다.



신의 죽음마저도 포함하는 종말이 진정한 종국이고, 그래야 비로소 처음이 비롯한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의미를 터득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신에 의한 심판과 재생, 절대적인 것에 의한 터득과 완성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신이나 절대도 생각해보면 이제까지의 지금 여기의 일그러짐과 온전하지 못함에 무책임할 수 없습니다. 그 가르침과 주장과 그로부터 말미암는 온갖 참과 규범을 좇아 살겠다고 애써 온 것이 오늘 우리의 정황이라면, 그런데 삶과 더불어 그 종교조차 ‘한심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라면, 그 신과 그 절대도 이 삶의 현실이 보여주는 황량함으로부터 면책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이나 절대도 종말의 계기에서 마땅히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드높은 가치나 의미로 수식된다 할지라도 ‘회복’이나 ‘복원’은 이미 적합성을 잃은 대책입니다. 요청되는 것은, 혹은 여기에서 지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새로움’ 뿐입니다.

신화는 실증할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달리 신화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허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허구가 지닌 진실’입니다. ‘사실의 기술’이 다 담지 못하는 ‘사실의 의미’가 신화라는 형식으로 읊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일면서 신화는 ‘역사가 쓴 시(詩)’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신화읽기’에 무게를 두게 되었고, 그렇게 신화라는 범주에 드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북유럽의 신화를 읽으면서 저는 갑자기 두려웠습니다. 지금 우리의 종교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를 향해 참람(僭濫)한 발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의 종교들은 충분히 ‘낡아’ 더 이상 어떤 역할도 할 수 없게 된지 오랜 것 같습니다. 애써 긍정적인 면을 찾아 거기에 줄을 대고 이어 살고 싶은데도 이미 구조적으로 상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종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가꾸어줄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 대해 덕담을 해도 모자란데 자칫 종교가 ‘저주’라고 들을 수도 있을 이러한 발언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때로 냉엄하게 정직합니다. 북유럽의 그러한 신화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득한 시대의 그곳에서의 인간의 경험을 우리는 겸허하게 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