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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한 교수의 간디에 관한 글을 읽고 생각한다

 news  letter No.576 2019/5/28 

 

 



간디에 관해 언급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그에 대한 모든 측면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이거나 예수님의 면모를 기술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니 다시 간디를 언급하는 일은 누구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한 교수가 이런 점을 의식하면서도 573호 뉴스레터에서 간디에 대한 글을 써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모처럼 간디가 화제로 된 이 기회를 빌려 간디에 대한 또 다른 면모, 또는 이 분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일도 보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간디는 관행적으로 “마하트마”로 불린다. 한 인간으로서 이 분이 지향한 바가 고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의 이미지는 “제2의 예수님”이거나 “성웅”이다. 우리는 그를 말 그대로 “위대한 정신“으로 우러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상의 개념어만이 이 분의 행적에 대한 서술로 적합하다. 그의 구체적인 행위나 현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순은 이 분의 이미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분은 혹시 “마하트마”란 승화된 호칭에 갇혀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이 분의 활동이 역사 현장, 곧 일정한 지역과 시간 속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거주지역은 이민자들이 격리되고 차별 받는 지역이었고, 제국주의적 억압의 장소였다. 거기서 간디는 훗날 그 자신을 대표하게 될 “비폭력”(Ahimsa)과 “진리파지”(Satyagraha) 이념을 제창하고 구체적으로 운동을 펴나갔다. 곧 그는 억압과 차별받는 이주민의 구체적 정치 현장에 있었고, 인도 이주민의 삶의 위상을 제고(提高)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힌두 내셔널리즘의 현장적 표출 방식이 비폭력과 진리파지인 것이었지, 비폭력과 진리파지라는 종교적 이상을 세속적으로 변용한 것이 힌두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고. 그래서 간디의 멘토 역할을 한 톨스토이마저 “간디의 힌두 내셔널리즘은 모든 것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경계를 한 것이 아닌가?

간디에게 남아프리카는 종교적 승화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투쟁의 장소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에서 간디가 체험한 것은 “인종적-종교적인 것”이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었다. 구체적 삶의 현장과 사회-정치적 의식 없이 간디를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인 관점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간디의 정치적 메시지는 항시 종교적 메시지 속으로 함몰되어 버리는 경향을 띤다. 그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은 반대했지만 카스트제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고, 열렬한 힌두교 주창자이었지만 이슬람과 힌두이즘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종교적 화해와 평화라는 이름아래, 또는 “마하트마”란 호칭 아래 손쉽게 이 모순들을 처리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모한 교수의 기고문을 읽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적/종교적 위대성에 빠져들기보다는 이런 현장의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해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V. S. 나이폴이 지적했듯이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이 자신의 찬양자”가 되고 말았고, “자신이 자신의 상징”으로 변했으며, “자신의 성스러운 캐리커츄어”가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인가? 나이폴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간디의 현실인식과 현장 정치 속에서의 입지를 되묻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마하트마”란 종교/정신성 속에서는 그의 행적의 모호성만 드러날 뿐이다.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보인 초기의 정치적 창의성 및 인도 근대성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종교적 승화”속에 사라져 버린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의 종교성이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되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닌가? 나는 식민지 경험을 겪으며 간디의 위대한 정신/전통이 어떻게 현장화 되었는지 알고 싶다. 간디가 겪은 인도 공동체는 분열상의 극치였다. 돈 많은 구자라티 이슬람 상인은 자신들이 “아랍인”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인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만 여겼다. 인도라는 단일한 실체, 또는 국가/민족단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 화합과 내셔널리즘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분열의 극을 달리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도 당시의 인도 못지않다. 남북의 분열은 물론이고,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문화전통과의 분리를 주장하고, 근대화는 오직 서구적 자본주의에로의 몰입의 길밖에 없다고 대부분 고집하고 있으며, 이웃돌보기의 배려와 복지의 행위는 공산주의 정책의 전횡으로 몰리고 있다. 간디의 전통적 내셔널리즘이 혹시 현대 한국에서도 작동될 수 있을까? 오늘 여기에서 간디와 같은 성웅의 메시지가 작동된다면, 결코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거의 환상에 가깝게 느껴진다.

간디에 대한 나의 문제 제기는 고매한 성자의 출현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인(聖人)의 출현과 그의 행적을 “종교”나 “종교적” 어휘로 승화시킬 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종교적 이념은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하며 현실/현장에 대한 구체적 정황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치 성서 해석학과 불교 논장의 해석이 항시 언제 어디서나 요청되듯이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성웅으로 추대하는 것은 늘 현장(現場)의 관점에서 해석을 필요로 한다. 모한 교수의 간디에 관한 주장 역시 이 요구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요 논문으로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불교에서의 인권이란무엇인가?>, <백교회통-교상판석의 근대적 적용>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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