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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墓碑)와 탑본(搨本)
: 돌에 새기고 종이에 베끼는 문화

 


news  letter No.587 2019/8/13       

 



새로운 책이나 논문이 있으면 무턱대고 복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는 시절 읽든 말든 복사부터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도서관에서 원서를 빌려 읽으며 독서카드에 일일이 베끼고 메모하고 반납하던 시기와 다른 모습이었다. 도서관의 책은 카피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시절이 지나고 이젠 종이에 복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사람들은 PDF파일로 책과 논문을 저장하고 복사한다. 복사는 현대 문화의 특징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원본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등본도 필요하고, 복사본도 필요하다. 대중들은 카피를 원한다. 인쇄 기술의 발달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던 것만큼 복사기의 발명도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복사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원래의 모양 그대로 베끼는 것이 신기(神技)에 속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 도서를 보관하던 봉모당(奉謨堂)에는 ‘탑본(搨本)’으로 분류된 자료들이 있다. 탑본이란 ‘베낀 것’이란 뜻이다. 등본(謄本), 등록(謄錄)이란 용어도 베낀다는 뜻이지만 이들은 내용을 베껴 적었다는 의미인 반면 탑본은 그 모양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란 의미이다. 탑본이란 용어는 낯설지만 탁본(拓本)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다.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이나 문양을 종이에 그대로 베껴내는 것을 탑본 또는 탁본이라 한다. 탁본은 돌에 종이를 대고 두드려서 새겨진 내용을 베끼는 방법이다. ‘탁본’이 두드리는 기술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면 탑본은 베끼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의 국가적 기록엔 탑본이란 용어가 더 자주 사용되었다. 탑본은 요철이 있는 것이면 뜰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평면일 때 용이하기 때문에 비석(碑石)은 탑본의 대상으로 가장 적합하다. 탑본이 금석문이나 서예가 또는 사료적 가치에 치중해서 이해되었지만 한편으로 돌, 특히 비석 문화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왕이 사망하여 국장을 치를 때면 능비(陵碑)를 세우면서 탑본도 같이 제작하였다. 비석에 종이를 대고 물을 칠해 밀착시킨 다음 솜뭉치에 먹을 묻혀 두들기면 비석에 새긴 글자 부분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이를 원탁(原拓)이라고 한다. 원탁은 바탕에 두드린 자국이 남아있고 색깔이 옅어 글자가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글자를 제외한 바탕을 다시 먹으로 칠하는데 이렇게 만든 탁본을 오금탁(烏金拓)이라 한다. 왕실의 탑본은 대부분 이러한 오금탁에 다시 종이와 비단을 덧대어 족자로 꾸며서 보관하였다. 그리하여 탑본은 “돌에 새기고 종이에 베끼고 비단으로 꾸밈”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 종교사의 근간이 되는 재질 중 하나가 돌이다. 고인돌에서부터 석탑, 석상, 돌하르방, 기자석, 비석 등, 원시종교, 민간종교, 불교, 유교 등 여러 종교와 신앙이 흥하였다 망하여도 돌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돌이 한국 종교의 전유물일 순 없다. 돌이 있는 곳이면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그것에 자신의 염원과 신앙을 다듬고 새겼다.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라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구절처럼 사람들은 바위의 견고함에서 불변의 영원성을 보았다. 그런 보편성 속에도 돌의 문화는 지역이나 시대마다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는 신이나 인간의 형상을 제작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신유학적 전통과 불교를 배척하면서 성장하였던 조선 유교의 특수한 사정이 결합된 결과이다. 어쨌든 그러한 전통 속에서 돌로 만든 조각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돌의 문화는 비석(碑石)으로 성행하였다. 죽음 앞에 서 있는 돌은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을까? 사람들은 죽어 부패하고 결국 사라질 시신의 무덤 앞에 돌을 세워 그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무덤의 비석은 풍비(豐碑)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풍비는 관을 매장할 때 무덤의 광 양쪽에 세우는 기둥을 가리키는 데 여기에 줄을 연결하여 관을 내렸다. 매장 후에 그 비를 남겨 두어 표식으로 사용함으로써 후대 비석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제사에 사용할 희생을 묶어두던 묘정(廟庭)의 돌[繫牲碑]에서 비석이 비롯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 구체적인 기능이 어떠하였던 비석은 돌의 견고함과 영원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덤 앞에 비를 세우는 까닭은 묘의 주인을 밝히는 것이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처럼 허망함을 더하는 것은 없다. 죽음 이후 육탈(肉脫)의 과정을 거치면 몸의 개체성은 사라진다. 무덤은 이러한 유골을 감추어버리는 대신 묘비(墓碑)를 통해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이 땅에 살다 죽은 한 사람의 존재를 증언한다. 대개 묘비의 앞쪽에 묘주의 성명을 새기고 뒷면 음기(陰記)에 망자의 행적을 남겼다. 이름과 공적이 돌처럼 견고하게 남아 후세에 전해지길 사람들은 바랬다.

돌은 견고하다. 거대할수록 위압적이고, 그 만큼 그 공간을 성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솟아있지만 비석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어 토착적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탑본은 카피를 통해 돌이 지닌 공간적 제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 현장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불멸의 욕구가 돌에 있다면, 내 주위에 가져다 놓고 싶은 소유의 욕망이 탑본의 종이에 있다. 탑본은 여러 개를 만들어 왕실의 가족과 고위 관리, 왕릉을 조성하는 데에 수고한 관리들에게 나누어 준다. 왕의 권위가 담긴 기념품이 되는 것이다.

돌과 종이, 어느 것이 더 오래갈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것의 수명이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이다. 견고할 것 같은 돌은 외부에 노출되어 깨어지고 사라지기 쉽다. 반면 궁궐 속 수장고에 깊숙이 보관되었던 종이는 잊힌 듯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시간을 거역하고픈 인간의 바램은 돌과 종이에 남아있다. 그곳에 남기려는 것은 무엇일까? 임금의 존재와 공덕이 그 만큼 귀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들이 귀해서라기보다 돌에 새기고 정성껏 카피함으로써 왕의 존재가 귀하게 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쓱’하면 복제되는 시대에 한자한자 베끼는 정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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