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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81호-물체의 영혼, 물체의 활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6. 8. 18:07

물체의 영혼, 물체의 활력

 

news letter No.681 2021/6/8

 



 


근대 서구 철학과 사상에서는 대체로 이 세계에서 인간만을 능동적 행위자로 조명하고, 비인간 동물이나 식물 등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생물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사물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약동하는 생명에 비해, 순전히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활력 없는 사물은 “죽어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근대 서구사회의 주류 철학과 사상을 비껴나면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사물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타일러(E. B. Tylor)는 『원시문화』에서 물질의 활력에 민감한 사람들에 대해, 물체의 생명성을 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 물체의 영혼을 가정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관습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어떤 높은 수준의 야만인 인종들은 우리가 영혼은 물론이고 생명조차 없다고 여기는
                통나무와 돌, 무기, 보트, 음식, 의복, 장신구 및 다른 물체들이 분리될 수 있으며 잔존하는
               영혼 혹은 영을 지닌다는 이론을 분명히 주장하며, 다른 대부분의 야만인과 미개인
               인종들도 그러한 이론에 거의 근접한 견해를 갖고 있다.

타일러는 현대 과학에서 생명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물에까지 생명력의 개념을 확장 적용하는 사람들을 “낮은 단계의 정신문화”에 속한 야만인들로 규정하고, 이들의 “원시적이고 어린애 같은” 사유와 그에 따른 관습들을 가리키기 위해 페티시즘(fetishism)이란 단어를 호출한다. 타일러는 페티시즘을 애니미즘의 하위 분야로 여기고, 그것을 “어떤 물체에 체현되거나 부착되거나 혹은 그것을 통해 영향력을 전달하는 영들에 관한 교리”로 정의한다.

사물이 일종의 의식을 지닌 듯이 여기고, 물체에 어떤 힘이 있다고 여기며, 물체에게 말을 걸고, 때로는 그 물체에게 기도나 희생물을 바치는 등 『원시문화』에 제시된 다양한 페티시즘의 사례들 가운데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약(medicine)’이다. 타일러의 설명에 따르면, 북미 인디언들은 환시나 꿈속에서 등장한 동물, 발톱, 깃털, 식물, 돌멩이, 칼, 파이프 등이 평생 동안 자신의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약’으로 일컫는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약’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위해 잔치를 연다. 그가 사망하면 그의 영혼을 사후세계엔 ‘행복한 사냥터’로 안내해줄 수호령으로서 그의 ‘약’을 함께 화장할 것이다. 나아가 북미 인디언들, 특히 치유 주술사들은 수많은 페티시들을 영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사용한다. 『원시문화』의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북미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물체가 발휘할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타일러는 1871년에 『원시문화』를 집필하면서, 동시대 혹은 그보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자료들을 입수해서 소개했지만, 나는 불과 몇 년 전에 어떤 힘을 가진 물체로서의 ‘약’을 마주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북미 밴쿠버 일대로 2주 가량의 연구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밴쿠버 박물관에서는 원주민 아동들을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해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한 기숙학교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에는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 그들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중간 중간에 원주민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동영상이나 글귀들이 눈에 띄었다.

전시실에서 나오다가 한쪽 끝 모퉁이에서 커튼이 둘러진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전시실에는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며 눈물 짓는 자신의 모습 등 기숙학교에서의 경험을 묘사한 여러 그림이 있었는데, 커튼이 둘러진 작은 공간 안에는 그런 그림들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위한 ‘약(medicine)’이 준비되어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커튼을 열어보니, 마치 알사탕처럼 보이는 알록달록한 작은 주머니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기념품이 아니라 감정이 격동한 사람들을 위해 원주민들이 직접 준비한 ‘약’이라면서, 그 사용법이 간단히 메모되어 있었다. 나는 삼나무 향이 나는 노란색 “약‘을 하나 집어 들고 나와서 여행 내내 가방 속에 들고 다녔고,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타일러의 『원시문화』에는 북미 원주민의 신화와 의례에 관한 언급이 종종 나오는데, 가장 번역하기 어려웠던 단어 중 하나가 ‘medicine’이었다. 『원시문화』에서는 역주로 간단한 설명을 달고 ‘약’ 또는 ‘치유’로 옮겼다. 밴쿠버 연구여행에서 많은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대화하면서, 북미 원주민의 ‘medicine’을 ‘회복력(resilient power)을 지닌 사물(나아가 사람, 혹은 그러한 행위 자체까지 확장 적용 가능)’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해보았다. 그렇지만 물론 타일러가 볼 때, 북미 원주민들의 ‘약’은 물체에 깃든 영이 발휘하는 힘에 대한 그릇된 믿음에서 생겨난 관습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타일러의 원시적인 야만인들, 미개인들은 살아있는 존재와 생명이 없는 물체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타일러가 그려낸 애니미즘과 페티시즘은 인간과 물체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는 원시적 오류의 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근 근대적 세계관의 바탕을 이루는 이른바 활력 없는 물체의 수동성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며, 비인간 생명은 물론이고 사물까지도 세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확산되고 있다. 제인 베넷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물질의 행위성 또는 비인간 사물들이나 온전히 인간이 되지 않은 사물들의 효능”에 주목하며, 물질의 활력(vitality)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는 사물이 본래 살아있지 않고 활력도 없다고 말하는 방식이야말로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할뿐더러 인간의 자만심과 지구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환상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순환하는 사물의 힘을 감지하고 심지어 존중하도록 요청한다.1)

이러한 시각을 가진 여러 학자들은 근대 서구의 주류 철학과 사상에서 ‘원시적’ 시각으로 평가절하되었던 비서구, 비근대인들의 사물에 대한 시각과 그들이 사물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다.

* * *

요즘 나는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독특성과 연결성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있다. 인간이 비인간 동물과, 식물과, 나아가 사물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세계에서 인간이 세계내 존재들과 맺는 관계의 양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살아있는 세계의 생명성을 다시 상상하고, 관여하고, 참여하고, 적절히 관계 맺는 방식을 이리저리 궁리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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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10]2020, 12쪽.

 



 







 


유기쁨_
서울대학교 강사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등이 있고, 역서로《원시문화 1권, 2권》(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아카넷, 2018),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1권~3권》(브로니슬로 말리노프스키, 아카넷, 2012), 《문화로 본 종교학》(맬러리 나이, 논형, 201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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