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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理): 인간과 자연의 접점
news letter No.790 2023/8/8
동아시아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는 흔히 원리(principle)나 패턴(pattern)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에 대한 이의도 제기되고 있다. 1986년에 윌러드 피터슨은 성리학의 리를 ‘coherence’(어우러짐)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에 브룩 지포린은 피터슨의 아이디어를 중국철학사 전체로 확장시켰다. 2012~2013년에 나온 Li(理) 연구서 2부작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시카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행한 강연에서 주자학의 리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물었다: “마른 나무에도 리가 있습니까?”
답했다: “사물이 있으면 리가 있다. 하늘은 붓을 만들지 않았다. 사람이 토끼털로 붓을 만들었다. 붓이 있으면 곧 리가 있다.”
問: “枯槁有理否?”
曰: “才有物, 便有理. 天不曾生箇筆, 人把兔毫來做筆. 才有筆, 便有理.”
(『朱子語類』「性理一」 ‘人物之性氣質之性’)
여기에서 주자는 리라는 원리(principle)가 먼저 있어서 그것에 따라서 붓이 만들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이 붓을 만들자마자 붓의 ‘리’가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화의 함축은 “사람이 리를 만든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리는 어떤 의미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자의 말이 도움이 된다.
가령 이 의자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다. 그래서 앉을 수 있는 것이 이 의자의 리이다. 만약에 이 의자에서 다리 하나를 제거하면 앉을 수 없게 되어 이 의자의 리를 잃게 된다(失理). 『주역』에 나오는 “형이상을 도(道)라고 하고 형이하를 기(器)라고 한다”는 말은 이 형이하의 기(=의자) 속에 형이상의 도(=리)가 있다는 말이다. (…) 가령 이 부채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러면 이 부채에는 도리가 있게 된다. 부채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마땅히 이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형이상의 리이다.
且如這箇椅子有四隻腳, 可以坐, 此椅之理也. 若除去一隻腳, 坐不得, 便失其椅之理矣. “形而上爲道, 形而下爲器.” 說這形而下之器之中, 便有那形而上之道. (…) 且如這箇扇子, 此物也, 便有箇扇子底道理. 扇子是如此做, 合當如此用, 此便是形而上之理. (『朱子語類』「中庸」 第1章)
지포린의 해석에 의하면 여기에서 리 개념에는 중층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내적인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사용이다. 즉 다리가 네 개라는 의자의 내적인 구조와 그래야 사람이 앉을 수(可以坐) 있다는 인간의 활용(用)이다. 그래서 의자에서 다리를 하나 빼면 내적인 구조가 무너지고 외적인 사용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의자로서의 리’를 잃게 된다(失理). 다리가 하나 빠지면 앉을 수 있는 가능성(=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자로서의 리를 상실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과 의자가 어우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뜻이다(즉 앉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말에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도 되는 것은 리에 ‘가능성’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포린은 성리학의 리에는 coherence(어우러짐)뿐만 아니라 compossibility(공존가능성)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예를 보면, 성리학에서의 리가 자연에 처음부터 내재해 있는 원리나 법칙이라는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붓이나 의자와 같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창조[生]되기도 한다. 이 경우의 리는, 탕쥔이(唐君毅)의 표현을 빌리면, 문리(文理) 즉 ‘문화적 리’라고 할 수 있다. 리 개념에 이와 같은 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말이 태생적으로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탕쥔이는 1955년에 쓴 선구적인 논문에서 리의 최초의 용례는 동사였다고 지적하였다. 『시경』에 나오는 “我疆我理(아강아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理(리)는 疆(강)과 함께 “(논밭을) 구획하다, 경계짓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물을 구분하고 가공하고 활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인간이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붓을 만들거나 의자를 만드는 행위와 같다. 그래서 중국철학에서의 리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唐君毅, 「論中國哲學思想史中理之六義」, 『新亞學報』 1:1, 45-98쪽.
Willard Peterson, “Another Look at Li 理,” The Bulletin of Sung-Yuan Studies 18, , 1986, pp.13-31.
Brook Ziporyn, Ironies of Oneness and Difference: Coherence in Early Chinese Thought; Prolegomena to the Study of Li, SUNY Press, 2012.
_____________, Beyond Oneness and Difference: Li and Coherence in Chinese Buddhist Thought and its Antecedents, SUNY Press, 2013.
_____________, “Teleology and Consciousness in Zhu Xi's Neo-Confucianism,” 2023.05.11. (https://www.youtube.com/watch?v=H-UJ9A292ZE)
조성환_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저서로 『한국 근대의 탄생』,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K-사상사』,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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