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쓴 인류, 마스크를 쓴 종교
newsletterNo.634 2020/7/7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올해 초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유행에 대한 뉴스를 처음 접할 때까지만 해도 전 세계가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느라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학생들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 비대면 강의로 종강을 하게 되고 해외에서 입국도, 해외로 출국도 철저하게 필터링되거나 차단되는 이런 유례없는 상황이 이렇게 기약없이 지속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마스크를 쓰던 것도 답답해 못 견디던 내가 마스크를 사고 챙기는 것이 일상이 되고,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생활에 이렇게까지 적응하게 될 줄도 몰랐다. 마스크 품귀현상, 마스크 착용으로 벌어진 시비, 마스크 수급량 기사, 아베마스크. 노마스크 등에 대한 기사가 연일 포털 뉴스를 장식하게 될 줄도 몰랐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마스크는 점점 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안경을 쓰지 않고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갈 수 없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 없으며, 공공건물이나 음식점에도 출입할 수 없다. 공적 공간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는 것은 불안하고 불온하다. 분명한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나 백신도 없으나 엄청난 전파력을 가진 이 바이러스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나에게도 이미 있을 수 있다. 마스크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막아주고,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로부터 타인을 지켜주는 보건과 방역의 매체이나, 매너의 가면/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마스크는 바이러스 차단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택트를 가능하게 하는 비대면의 관계, 유예된 관계의 기호가 되어가고 있다. 마스크는 코로나 시대 인류의 새로운 얼굴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가장 많이 나오고 확산세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마스크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 몇몇 국가에서 히잡을 여성인권 억압의 상징이며 세속주의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공공장소에서 히잡이나 부르키니 착용을 금지 혹은 제재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 정치인은 히잡을 쓰는 것은 세계화된 유럽의 에토스와 부합하지 않으며, 사회통합을 위해 공공장소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복면을 쓴 테러리스트들이 유럽의 곳곳에서 무차별 테러를 일으키면서, 얼굴을 가린, 즉 자신의 정체를 가린 사람은 잠재적인 위험인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문화적 풍토는 더욱 강화되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자신을 감추어야 하는 범죄의 기호이며,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 문화, 개인주의적 자유의 반대편에 있는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이 계속되면서 마스크는 가장 일차적인 방역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지만, 아직도 상당수 국가에서는 마스크 착용의 비율이 현저히 낮고, 공적 자리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나 획일적인 마스크 착용문화에 거부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런 풍토가 코로나19의 확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코로나 시대의 마스크가 혐오와 차별, 혹은 억압의 상징을 넘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마스크 착용이 당연시되면서 만들어지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풍토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스크를 쓴 코로나 시대의 인류는 마스크를 통해 미지의 바이러스의 침투를 차단한다. 마스크를 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한다. 마스크를 살 수 있는 사람과 마스크를 살 수 없는 사람이 나누어진다. 마스크를 쓴 나라와 마스크를 쓰지 않는 나라를 구분한다. 몇 달간의 코로나 상황에서 그러한 분류체계가 온갖 매체를 통해 유통되고 자연스럽게 의식화되었다.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구습만을 고수하다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자가당착에 빠지는 사람들로 표상화되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 된다. 마스크를 쓴 얼굴은 매너화된 사회적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뻔뻔하고 무례하게 마스크도 쓰지 않고 돌아다니다니....와 같은 의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종교도 위험한 종교가 된다. 마스크로 상징화될 수 있는 매개/매너가 없는 종교, 사회적 얼굴이 없는 맨얼굴의 종교는 불온하다. 감히 마스크 없이 만나는 것을 지향하는 종교는 전염병을 옮기는 거대한 병원체, 고위험 시설이 된다. 이제 신과의 만남도 초월자에 대한 명상에도 마스크가 필요하다. 각종 동상과 심지어 소녀상에도 마스크가 씌워진다.
이미 그 자체로 은폐(감춤)와 폭로(드러냄)의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하나의 가면일 수 있는 종교에 코로나 시대의 방역의 마스크/가면이 외부에서 덧씌워져 마스크 속에 갇힌 듯한 기이한 풍경.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 뒤에서 침묵하는 종교는 어떤 모습으로 코로나 이후, 마스크 이후를 상상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마스크 없이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마스크 없이 신을 만날 수 있을까?
마스크 없이 입으로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마스크 없는 진정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종말론적 상상으로 기대하게 된다.
안연희_
선문대학교 연구교수
논문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형성과 그 종교사적 의미>, <“섹스 앤 더 시티”: 섹슈얼리티, 몸, 쾌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다시 읽기> 등이 있고, 저서로 《문명 밖으로》(공저), 《문명의 교류와 충돌》(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