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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희생’이라는 말의 그림자
news letter No.870 2025/2/18
최근에 발생했던 계엄령 선포를 나는 연구실에 앉아 있다가 해외에 머물고 있던 한 후배의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집에 가는 길이 안전할지 염려하면서 길을 나섰는데, 헬기 소리가 들려 연구실로 돌아왔다가 12시가 넘어 겨우 집으로 향했다. 어떤 명예 교수님께서 학교가 제일 위험한데 왜 학교에 있었냐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더 이상 대학의 구성원들은 계엄을 선포하는 권력자에게 위험한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 후에 뉴스나 여러 매체에서 보았던 사진 속에서 각종 장비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군인들은─물론 직업군인이었겠지만─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카들, 그간 입대하기 위하여 학교를 떠났던 학생들의 모습과 겹쳤고, 병역의 의무나 군인의 존재에 대하여 내가 그간 상당히 무신경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총기류를 옆에 두고 생활하는 환경이 요구하는 거의 절대적인 상명하복 체계뿐 아니라, 어떤 상관이나 동료를 만나는가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군 생활에 대해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고통에 대한 예방주사(?)의 기능도 있겠고, 인내심과 강인함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애써 더 이상의 생각이나 상상을 누르곤 했던 것 같다.
칸트는 “타인을 죽이거나 타인에게 살해당하기 위하여 고용된다는 것은 인간이 단순한 기계나 도구처럼 국가의 손에 사용되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사용은 우리 인간 자신의 인격에 존재하는 인간성의 권리와는 전혀 조화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라는 저작에서 제시된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중 “상비군은 점차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항목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면서 거론했던 말이라고 한다.1) 칸트의 말이 틀리지 않건만, ‘세계적 차원에서의 영구 평화’라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몽상’으로밖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존 레논(John Lennon)도 “모든 사람이 평화 속에 살아가는 것을 그저 ‘상상해 보라’(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실현 가능하여 인류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18세기에 했듯이 예비 조항과 확정 조항, 추가 사항 등으로 나누어 치밀하게 사고하고 기획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집권 이후 전 세계의 정계, 재계 인사들이 그의 비위를 어떻게 해야 더 잘 맞출 수 있을까를 경쟁적으로 고민하는 이 마당에 국가들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한 기획이라는 말은 얼마나 코미디 같은가!
20세기를 ‘전쟁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21세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 핏빛으로 얼룩졌던 지구는 각종 명분의 전쟁과 폭력으로, 게다가 어디로 원인을 돌려야 할지 모를 각종 대형 사고와 자연재해로 나날이 더 붉게 물들어가는 듯하다. 최근 진행된 헌법재판소에서 현 대통령은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2024년 12월 하마터면 이 땅 아주 가까이에서 난데없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보니, 과연 어떤 이들의 피가 지구를 붉게 물들여 왔고 또 물들이고 있는 것인지, 또한 그들은 어떻게 기억되거나 망각되어 왔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상기되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최근의 계엄령 선포로 인하여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소환되는 중이다. 아마도 K-컬처나 한류라는 말에 익숙한 10대, 20대에게는 참으로 낯선 대한민국의 가까운 과거사일 것이고, 1980년과 그 후 몇 년간 그 수상한 소식과 사건을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유로든 고개를 떨구거나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는 악몽일 것이다. 참으로 처참했던 광주의 주검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바쳐진 ‘숭고한 희생자들’로 5.18 민주묘지에 모셔져 국가적인 추모를 받게 되었다.2) 희생자들과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광주 시민들이 이로써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이런 국립묘지나 국가적인 추모가 아니어도, 숭고한 희생자들은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되어 살아있는 자들을 살아가게 한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인류사에 전쟁 없는 날이 없었지만, 정전(正戰, just war)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결단했거나 참여했던 전쟁이 정전이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과연 정의로운 대규모 살상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정전 아닌 전쟁은 없었다고 할 만큼 모든 전쟁으로부터 수많은 ‘숭고한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계엄 상태에서는 계엄군이 동원되기 마련이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민간인들만 희생되는 것은 아니다. 광주에서 희생된 군인과 경찰들은 각자 개인의 사정을 안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어느 누구도 즐겨 입에 올리거나 추모하지 않은 듯하다. 2024년 12월의 계엄령으로 인하여 만약 어떤 충돌이 발생했거나 그로 인하여 사상자들이 있었다면 누가 숭고한 희생자로서 추모되고 누가 망각되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더 이상 ‘숭고한 희생’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연한 계기로 읽게 된 다카하시 데쓰야의 《국가와 희생》은 《야스쿠니 문제》의 후속판이라고 한다.3) 저자는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 답은 No! 다. 즉, 모든 희생의 폐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모든 희생의 폐기를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동시에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칸트처럼 인류가 반드시 국가 간에 전쟁 없이 영구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자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Imagine’의 가사처럼, 소유물도 탐욕도 배고픔도 없이 형제애로 맺어진 사람들이 모든 세상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상상’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 세상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다.4) 21세기의 사반세기에 가까워지는 지금 우리는 ‘숭고한 희생자’가 없는 세상을 꿈꾸거나 상상할 수 있을까? 답은 Never! 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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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필자는 다카하시 데쓰야의 《국가와 희생》(이목 옮김, 책과함께, 2008)의 236쪽에서 인용하였다.
2) 이에 대하여 다카하시 데쓰야는 “민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광주 민중항쟁에서 학살당한 민중이 국가의 영령이 되어, 국가로부터 저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추모되는 것에 대하여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위의 책, 253쪽). 그러나 그의 당혹감은 일본에는 이러한 국립묘지가 없기 때문일 뿐, 칠레•아르헨티나•필리핀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이들을 위한 국립묘지가 있다.
3) 원저는 2005년 日本放送出版協會에서 출간되었다.
4)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이연승_
서울대학교 교수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저서로 《동아시아의 희생제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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