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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50호-세 가지의 끝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1. 5. 11:34

 

                                       세 가지의 끝

 

 

 


 

news letter No.450 2016/12/27

 

 


이 한 해의 끝

한 해가 가고 있다. 양력으로는 올해가 며칠 안 남았고, 음력으로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났으니 낮이 점차 길어지는 게 당연하고, 곧 새해가 올 것이다. 기후변화로 자연의 운행이 많이 교란되고 있으나, 우리들의 계절 변화는 아직 여전하다. 물론 앞일은 장담할 수 없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입으로 기후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중국이 꾸며낸 농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활개를 치는 판이니, 앞으로 우리의 자손들이 과연 이대로의 계절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 의문이 다시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견뎌낼 수 있는 한도를 넘게 되면 지구는 스스로 자구책을 궁리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몸을 털어내 인간이라는 기생충을 지구에서 쫓아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호모 사피엔스 멸종의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흐름의 리듬은 아무래도 계절의 변화이다. 우리의 심장 박동 및 들숨과 날숨의 교대와 함께 계절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기준이 된다. 계절의 시간은 음악처럼 높낮이의 율동을 갖추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저절로 움직여간다. 시간의 끝과 시작은 그렇게 이어진다.


이 정권의 끝

박근혜 정권은 이미 끝났다. 원래의 마감 시간표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동안 막혀있던 온갖 추문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미 죽은 자가 산 자의 영역에 출몰하면 좀비가 되기 마련이다. 좀비 영화처럼 잔인한 것은 없다.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좀비를 죽이는 방식에는 한도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수성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좀비는 산 사람들의 세상에 출몰하기를 멈추고, 죽은 자가 머무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좀비이기를 고집하고 있다. 추측컨대, 그가 버티는 이유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좀비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좀비와 동행해서 집단 퇴장하기 위함이다. 후자이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전자라는 심증이 든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을 공주와 여왕과 같은 예외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의 선천성 공감능력 결핍증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 급이 다른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에 장착된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지 싸늘한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인 것이었다. 아직도 배 안에 남아있는 시신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세월호 침몰의 진상 규명의 요청을 종북 좌파의 획책으로 몰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온갖 모욕을 가했을 때, 박근혜 정권의 끝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이 체제의 끝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말문이 막히고, 도대체 상상하기 힘들다.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평온하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정말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단지 달걀과 치킨 값 인상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40일 사이에 26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생매장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조류가 학살당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도저히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다. 하루아침에 떼로 생매장을 당하는 그들의 비명 소리가 방방곡곡 들리고 있다. 그만큼의 원한도 우리 주변에 쌓이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일어난 것이 없다는 듯이 우리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제 정신이라면, 더 이상 이런 잔인한 체제에 동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남의 고기를 먹고 진화해온 과정이다. 물론 대형 고양이과의 다른 포식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포식자와 다른 점은 불필요할 정도로 남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예로부터 종교가 해온 일의 하나는 이런 인간의 탐욕을 견제하고, 남의 고기를 먹을 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고삐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기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우리의 입속에 들어가는 고기가 어떻게 얻어지는지 조금이라고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 생명체의 고통을 조금이라고 느낀다면 이런 식의 공장제 사육은 용인될 수가 없다. 현재의 조류독감은 공장제 사육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가 그 근본 원인이다. 공장제 사육을 유지하려고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몸속에 독성을 쌓아두고 서서히 파멸하는 경로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태평스러운 우리의 해맑은 표정은 불길하다. 이런 불길한 기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음식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자신의 살을 내주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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